▲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미국의 우파 신문의 중심에 우뚝 선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1917~2001)의 자서전은 이름부터 ‘워싱턴포스트와 나의 80년’이다. 중앙일보가 1997년 번역해 한국판도 냈다.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미국 현대 신문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부유한 금수저로 태어난 우파 신문의 여성 발행인이 시카고 대학 시절 좌파 이념에 빠져 거리를 뛰어다녔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습기자로 첫발을 내디디며 파업 현장 노동자와 젊음을 불태웠다는 얘기는 덤이다.

그는 경영난에 빠진 워싱턴포스트를 어린 나이에 인수했던 아버지 유진 메이어를 보고 자랐다.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워싱턴포스트의 기틀을 다지며 당시 미국 정치계 킹메이커로 활약했지만 결국 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편 필 그레이엄을 이어 졸지에 신문 경영을 맡았다.

1971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추적 보도하면서 닉슨 행정부의 엄청난 압력에 맞서 우드워드·번스타인 등 기자들의 방패 역할을 했던 그는 자주 경쟁신문을 언급하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 때 자주 등장하는 신문이 뉴욕포스트였다.

1801년에 창간한 뉴욕포스트는 미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현장인 미국 뉴욕에서 무려 221년이나 살아남았으니 대단하다. 이 미국 최고의 조간신문 뉴욕포스트가 지난 16일 26면에 보도한 단신기사 하나가 많은 뉴요커들에게 웃음을 선물했다. 뉴욕포스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대선 재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가십 거리로 비꼬면서 격하했다.

그렇다고 뉴욕포스트가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좌파 신문도 아니다. 이 신문은 미국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 뉴욕 이브닝 포스트라는 이름으로 창간했다. 초기엔 정론지로 여론을 주도했으나 이후 뉴욕 타임스와 뉴욕 데일리 뉴스에 밀려 경영이 어려워져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면서 시시콜콜한 대중지로 탈바꿈했다. 1976년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이 3천만 달러에 인수한 뒤 전면에 주로 정치인이나 연예인 가십 기사를 배치해 눈길을 끄는 전략을 고수하면서 종종 지나친 선정성 때문에 물의를 빚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성향이다. 트럼프가 대통령 되기 훨씬 전부터 이 신문은 트럼프를 자주 1면에 띄우며 그를 후원했고, 2016년 대선 때는 트럼프를 공개 지지했다.

그런 신문이 이날 트럼프의 재출마 소식을 1면 맨 아래 안내판에 ‘플로리다 남자가 어떤 발표를 했다’고 소개한 뒤 26면에 ‘도널드, 겪을 만큼 겪었잖아’라는 제목으로 기자 이름도 없이 단신 처리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플로리다의 한 은퇴자가 대선에 출마한다고 깜짝 선언했다. 열혈 골퍼인 도널드 트럼프가 기밀문서 도서관인 자신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를 향한 처절한 조롱이다.

뉴욕포스트만 그런 게 아니다. 유력 보수신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두 차례나 사설에서 트럼프를 비판했다. WSJ은 “민주당이 트럼프 출마를 내심 반긴다”며 “트럼프가 민주당 비밀 병기라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미국 최대의 보수 뉴스채널로 트럼프가 백악관 시절 종일 틀어 놓았던 폭스뉴스는 이달 15일 그의 대선출마 선언 연설 중계를 중간에 끊어 버렸다.

미국 보수언론은 막판에 트럼프가 보여준 분별없는 행동에 질렸다. 트럼프의 폭주가 미국을 망칠 것이라며 우려한 나머지 재출마에 제동을 걸었다. 아무리 보수언론이라도 나라가 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다는 결심이다.

그런데 한국엔 이런 용기 있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보수언론이 없다. 그저 권력에 이쁨받으려고 줄 서는 강아지 언론만 수두룩하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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