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공공운수노조가 대정부 투쟁에 나선다. 올해 파업은 여로모로 쟁점적이다. 인플레이션과 경제침체 탓에 국민 정서가 예민하다. 파업이 정당성을 갖추지 못하면 반감이 이전보다 클 수도 있다. 낮은 지지율로 곤란을 겪는 윤석열 정부의 대응이 어떨지도 관심사다. 통상 보수정부는 ‘노조 때리기’로 자신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공공운수노조가 파업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인정받으려면, 첫째 요구로 내건 공공성 확대와 민영화 저지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성 개념부터 살펴보자. 공공성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부의 공공재 공급을 뜻한다. 공공성 확대라 함은 정부가 공공재를 더 공급하란 의미다. 공공재는 국방·치안 같은 사회존속에 필요한 공권력부터, 철도·도로·전기·수도 같은 경제기반시설, 그리고 교육·의료·연금·실업급여·기초생활보장 같은 사회복지까지 포함한다.

공공재 공급은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고 치안이 불안하면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자본을 투자하지 못한다. 저렴한 노동력이 있어도 전기·도로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공장을 지을 수 없다. 교육기관이 발전하지 못하면 고부가가치 산업은 꿈도 못 꾼다. 공공재가 부족해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면 정부가 세금을 걷지 못해 공공재 공급이 더욱 줄어든다. 악순환이다. 아프리카의 빈곤국들이 이런 케이스라 하겠다.

그러면 공공재는 다다익선일까? 그렇지는 않다. 무임승차와 정부실패 문제 때문이다. 공공재로 이득을 얻으면서 생산에는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면, 노력해서 얻는 것보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공공재로 얻는 이득이 크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경제가 침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무임승차 문제다. 나쁜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인지상정이다.

정부실패는 공공재 공급이 늘면서 도리어 국민의 생활 수준이 하락하는 현상이다. 공공재로 모든 수요를 처리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계획경제는 경제 수준이 낮을 때는 자본과 노동을 동원하는 데 효과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생산과 수요가 복잡해지면 자원 배분과 결과 분배에서 비효율성이 급증한다. 더불어 정치권력이 경제까지 지배하다 보니 부패도 증가한다. 1970~80년대 소련 사회주의는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해 결국 붕괴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과 서유럽에서도 너무 커져 버린 복지를 감당하지 못해 신자유주의로 불린 정책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요컨대 공공재를 적절하게 효율적으로 공급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도해서도, 과소해서도 안 된다. 예로 미국의 경우 의료부문의 공공재 부족이 최근 십수 년간 논란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선진국 중 가장 형편없는 건강 수준을 기록하고 있어서다. 과소한 공공의료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탈리아는 공공재의 비효율성이 쟁점이 된 사례다. 20세기 중반부터 남부유럽의 대표적 복지국가로 올라선 이탈리아는 1980년대의 경제침체와 인플레이션에 공공부문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정부 채무가 급증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곤란을 겪고 있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고, 정부 부패가 가장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북유럽 나라들의 경우 규모와 효율의 균형을 적절하게 찾은 사례다. 정부 지출 규모로 보면 공공재 공급 규모가 매우 크지만, 그럼에도 정부 채무 비율은 낮다. 경제학 원리대로 공공재가 민간 생산성 상승의 기반이 됐다는 의미다. 스웨덴의 경우 노동운동이 앞장서 이 균형을 찾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선진국 수준의 경제 기반시설을 공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사회복지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경제성장 속도가 둔화하고 고령화가 빨라지면서 사회복지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여럿 발생하고 있다.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사회복지 확충에는 의견이 같다. 하지만 문제는 조세 부담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점이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은 것입니다” 같은 구호가 선거에서 먹힌다. 지표로 봐도 실제로 그렇다. 세계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32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하위권이다. 반면 공공부문 노동자의 경우 선진국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민간에 비해 좋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유한다.

공공운수노조가 공공재 확충을 주장하려면 이런 부분을 헤아려야 한다. 공공의 부패를 일소하고, 효율성을 향상하며, 임금·고용을 민간과 연대하는 방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공공성 확대에 관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한편 노조가 내세우는 민영화 저지의 경우 과도한 프레임이란 생각이 든다. 노조의 ‘민영화 금지법’을 보면, 공공서비스는 에너지·교통·공항·항만·교육·보건·의료·복지·돌봄·문화·정보통신·주거 환경 및 이에 준하는 서비스로 정의돼 있다. 일부 제조업을 빼고는 경제 대부분을 포괄한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공재가 공급된다는 논리인데, 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영화 규정 역시 지나치다.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지분 매각부터 시장개방 및 경쟁체제 도입, 민자 투자, 민간위탁까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공공재가 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고, 공기업이 그 부분의 노동자 전체를 직접 고용하지 않으면 민영화라는 뜻이 된다. 이런 식이면 무임승차와 정부실패 문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긴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숫자 맞추기 식의 주먹구구식 행정을 펴는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 공공운수노조야 말로 현장에 입각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민영화’로 프레이밍하는 건 과도하다. 민영화 담론이 공공운수노조의 다른 정당한 요구까지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공공성과 민영화에 대해서 숙고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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