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상범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장면 1 : 빼앗긴 봄, 4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고 그중에서 4월이다. 엘리엇이 시 <황무지>에서 4월을 “잔인한 달”로 묘사하면서 4월을 그렇게 알고 있다. 거기에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 불길한 달로 생각한다. 오죽하면 엘리베이터에 4층 버튼 대신 F(Four)를 쓸까? 반면 박목월은 <4월의 노래>에서 목련꽃 피는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히는 달이라고 말했다. 4월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겨울이 지나고 새싹이 돋는 3월과 신록이 짙은 5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달은 4월밖에 없다는 것이다. 4월은 지천에 파릇파릇한 연두색 잎사귀가 피고 적당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그래서 춥지도, 덥지도 않는 딱 좋은 달이다. 그러나 2014년 4월16일 그날 이후 생동감과 매력의 4월은 사라졌다. 낯 간지러운 봄바람과 따뜻한 햇살 대신 차갑고 매서운 바다가 생각난다. 304명의 꽃다운 학생들이 우리 곁을 떠난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봄을 빼앗아 갔다. 아직도 정확한 원인 규명이 되지 않았고 책임자 처벌도 없이 8년이 흘렀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모든 일상이 2014년 4월16일에 멈춰 버렸다. 나만큼 아이 잃은 부모님들도 4월을 봄이 아닌 추운 겨울로 느낄 것이다.

장면 2 : 빼앗긴 가을, 10월

4월만큼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고 그중에서 단풍철인 10월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유행가가 생각난다. 9월 말에 금강산과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은 10월에 이 산하(山河)를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덮는다. 사람들은 오색 찬란한 단풍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단풍은 사람들을 산으로 끌어당기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러나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는 가을이 주는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태원 참사로 사망 158명, 부상 196명 등 300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코로나19로 억눌렸던 젊은이들이 핼러윈데이를 맞아 이국적인 거리인 이태원에서 축제를 즐기다 변을 당했다. 이태원 거리에는 질서 유지를 하는 경찰도, 지자체 담당자도, 안전요원도 없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국가는 외면했다. 그래서 인재이며 참사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행정안전부 장관·경찰청장·용산구청장은 사과 없이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이태원 참사는 10월의 마지막 밤을 슬픔으로 만들었다.

장면 3 : 빼앗긴 안전한 일터, 365일

빵이 주는 달콤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이 찌는 것도 모르고 간식으로, 때론 주식으로 달달한 빵을 먹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에 파리바게뜨로 잘 알려진 SPC 사업장에서 20대 청년이 빵 만드는 기계에 끼여 숨졌다. 청년은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고 사측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2인1조 근무규칙도 어기며 일을 시켰다. 매년 일터에서 800명 넘는 노동자가 죽는다. 지난해 한 해에만 828명이 산업재해를 당했다. 하루에 3명꼴로 노동자가 죽고 있다. 지난해 기준 건설업(417명)과 제조업(184명) 사망자가 전체 70%를 넘는다. 또한 10명 중 8명이 50명 미만 사업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이런 산재를 막고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해 제정돼 올해 시행됐다. 50명 미만 사업장은 2024년부터 적용받도록 유예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고용노동부에 50명 미만 사업장에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 50명 미만 사업장의 경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은 2024년부터인데 아예 없애려고 한다. 매년 8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망하지만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매일 3명의 산재 사망자에 해당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일해야 한다.

장면 4 : 좋은 나라에 대한 희망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그리고 매일 3명씩 발생하는 산재 사망사고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먹먹하다. 정부는 사과도 없고 책임지지 않은 채 희생양만 찾는다. 세월호 참사 때 해양경찰, 이번 이태원 참사 때는 용산경찰서와 소방서, 작업장에서 산재사고는 안전을 지키지 않은 노동자의 잘못이라고 희생양 삼는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놀러 가서 죽었는데 왜 정부가 책임져?” “돈 벌다 죽은 것을 왜 사장이 책임져? 월급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심지어 일부 보수기독교계에서는 이번 이태원 참사를 ‘북한 소행’이라고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생명의 소중함도 모르고 공감능력도 없는 ‘일베스러운’ 생각들이다.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국가는 모든 국민의 안전과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 4·16 세월호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의 원인규명을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 국가책임이다. 그런 국가가 있을 때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국민이 웃으며 인사하고 슬픔없이 행복을 누리지 않을까?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의 가사처럼. 윤석열 정부하에서 ’좋은 나라‘를 바라는 소박한(?) 꿈은 실현 불가능한 개꿈일까?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 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 거요.// 그곳 무지개 속 물방울들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시인과 촌장 <좋은 나라> 중)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wadrg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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