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년 가까이 노조파괴에 항의하는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의 천막농성이 진행됐던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 본사 앞 인도에 화단이 생겼다.

서초구청이 최근 양재동 SPC 본사 앞 인도에 5미터 넘는 아름드리 가로수 세 그루와 허리 높이 나무 20여그루를 심어 가로 8미터 세로 1미터의 화단을 조성했다.

연일 불법이 자행되는 노동 현장의 억울함을 알릴 길이 없어 그룹 본사 앞에 벼랑 끝 천막을 치고 광장의 시민들에게 호소했던 공간을 지방정부가 봉쇄했다. 노조는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하려는 ‘꼼수’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구청은 주민 편의를 위한 ‘묘수’라고 일축했다.(한국일보 11월16일자 10면 ‘SPC 본사 앞 농성 막으려고? 인도 중앙에 나무 심은 까닭은’)

공권력이 앞장서 기업 이익의 수호자를 자처한 셈이다. 대신 노동자 이익은 깡그리 짓밟겠다는 발상이다. 한국에 이런 공간은 한두 곳이 아니다. 용산역 앞 광장에도 ‘어마무시한’ 크기의 화분이 들어서 광장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쌍용차 농성장도 경찰이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천막을 강제 철거한 직후 중구청이 화단을 만들어 광장을 덮어 버렸다.

지난해 8월엔 삼성전자 서초 사옥 앞 왕복 4차선 도로 약 130미터 구간에 대형 화분 154개를 설치해 거대 재벌 삼성을 향한 노동자들의 분노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이 역시 서초구청이 집행한 거다.

왜 재벌의 이익을 공권력이 보호하고 나서는가. 유럽 어디를 가도 광장은 그대로 열려 있다. 열려 있어야 광장이다. 유럽인은 인구 1천명만 넘으면 어김없이 ‘ㄷ’자 형태의 광장을 만들었다. 아니 만든 게 아니라 저절로 생겼다고 해야 옳다. 오가는 사람이 모여서 물건을 팔고 흥정하면 곧 광장이 됐다. 광장 뒤엔 관공서가 들어서고 광장 앞은 자유롭게 열린 공간이 된다.

마드리드·론다·살라망카·바르셀로나 등 스페인 모든 도시마다 광장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스페인 광장은 로마에 있다.

집회의 자유와 시민 기본권 중에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광장을 갈아엎고 화분을 설치하는 게 시민 기본권을 지키는 길일 순 없다. 집회하는 그들도 시민이기 때문이다.

시위 때문에 시민이 극심한 불편을 겪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맞다. 광장에 화단을, 화분을 설치해 열린 공간을 막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서초구가 나무를 심은 그 땅은 오가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는 이른바 ‘공개공지’이다. 그 공개공지를 재벌 앞마당으로만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그렇게 억지로 만든 녹지는 보기에만 좋을 뿐 시민과 노동자의 자유로운 집회와 시위를 제약한다.

공교롭게도 노사합의로 지난 3일 노조가 천막을 치우자마자 구청이 나서 녹지로 꾸민 건 집회와 시위를 막고 싶다는 의지만 보여준다.

노조가 천막농성할 때 구청은 시민 통행을 방해한다며 천막 철거를 요구해 놓고 이번엔 화단을 만들어 통행을 가로막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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