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재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 차장

올해 1월11일,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한 업무환경에 노출돼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이 개정돼 내년 1월12일부터 시행된다.

개정법에서는 건강손상 자녀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인자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위임했다. 고용노동부는 연구용역을 통해 올해 10월17일 태아의 건강손상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인자를 크게 △생물학적 유해인자 △약물 유해인자 △화학적 유해인자 △물리적 유해인자 △그 외 출산한 자녀의 건강손상과 의학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유해인자(포괄 규정) 5가지로 구분해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노동부는 시행령 개정안에 명시한 유해인자에 대해 예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임신 중인 노동자가 시행령에 명시되지 않은 유해인자에 노출돼 건강손상 자녀를 출산하게 되면 그 원인에 대한 상당인과관계를 노동자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화학적 유해인자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규정한 것도 문제다. 태아의 건강손상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은 약 1천400여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개정안은 이 중 고작 17개의 화학물질만 포함시켰다. 노동부는 의학적 기준에 근거해 기형 유발에 대한 인간 대상 연구가 실시된 화학물질만 유해인자로 규정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기형 출산과 관련한 의학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 생식독성 물질은 임상연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작 17개만 인정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건강손상 자녀 관련 유해인자 범위를 이렇듯 협소하게 규정하면 태아산재법은 있으나 마나 한 법이 되고 만다. 태아산재법 입법 취지에 부합하려면 유해인자 범위를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

노동부는 마이크로메덱스 목록(국제 생식독성 화학물질 목록)에 없다는 이유로 몇백 개의 화학물질들을 통째로 제외하고, 해당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면밀한 검토 없이 50여개의 화학물질을 제외하기도 했다. 전 세계 기형을 유발하는 모든 생식독성 물질들이 마이크로메덱스 목록에 있는 것도 아니고 취급 사업장수가 적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외에도 노동부는 유해인자 범위 확대가 여성노동자의 취업을 제한할 수 있는 문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위험성을 알면서도 은폐하려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한국노총은 지난 산재보험 노사정 TF를 통해 임신노동자 보호를 위해 최소한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산재보험법 등 현행법상에서 규정하는 임신 중 사용금지 물질이나 유해인자를 시행령 개정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개진해 왔다. 그러나 관련 논의가 무색하게도 노동부는 출산 여부에 따라 태아의 건강손상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인자가 상이하며, 현행법상 규정하는 임신 중 사용금지 물질의 대부분은 건강손상 자녀 출산 원인과 관련성이 낮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앞세워 독단적인 시행령 개정안을 만들었다.

노동부는 산재로부터 임신노동자와 그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본법이 개정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렵게 만든 태아산재법을 실효성이 없는 법으로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 노동부는 태아산재법 입법 취지를 훼손시키지 말고 한국노총의 요구를 수용해 온전한 시행령 개정안을 다시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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