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섭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이후 경영계를 중심으로 개정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중에 하나가 ‘필요한’ 예산, ‘충실히’ 수행 등의 표현이 모호해 경영책임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를 분명하게 정해 달라는 요구다. 이를 받아서 정부가 시행령 개정 작업을 하고 있다.

안전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의문이 들었다. 업종마다 사업장마다 특성이 다 다른데 ‘필요한’ ‘충실히’를 사전적으로 구체화하기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설령 정한다 한들 일률적인 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아 수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많은 법률 전문가들이 형법상 명확성 원칙을 들어 문제점을 지적했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죄를 묻기 위해서는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법률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보건 관련법도 형법처럼 이 원칙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가. 따라야 하는 규칙의 내용이 다르고 규칙으로 정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는 입법기술상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형법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정한다. 살인하지 마라거나 도둑질하지 마라고 정하고 이러한 행위를 하면 처벌한다. 해서는 안 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안전보건법령은 대부분 해야 되는 행위를 정한다. 추락 위험이 있으면 안전난간을 설치하라고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한다. 해야 되는 행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과 작업환경이 변하는 첨단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안전선진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영국 고소작업규칙 6조는 “고소작업이 이뤄질 때, 고용주는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작업자의 부상을 초래할 수 있는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적합하고 충분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적합하고 충분한 조치’를 하라는 규정은 영국 산업안전보건법령을 관통하는 일반적인 규제방식이다. 영국의 산업안전보건법 40조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그 의미를 정하고 있다.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조치하라는 의무 위반과 관련된 재판 과정에서, 피고가 의무를 충족하기 위해서 실제 행한 조치보다 더 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이 규정에 대한 적법성이 다퉈졌으나 법원은 입증책임의 전환이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며 균형을 잃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안전보건법령 위반 사건 재판에서 ‘범죄가 입증되기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일반 형사사건의 원칙이 크게 바뀌었다는 평가다.

영국의 이러한 접근방법은 ‘위험은 생산하는 자, 즉 사업주에게 그 통제의 책임이 있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보건 확보의 구체적인 조치방법을 사업주에게 맡기는 목표기반 규제로 바꾼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다. 그간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사고를 크게 줄이는 효과성도 입증됐다. 영국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사망하는 가능성은 우리나라의 10분의 1을 훨씬 밑돈다.

정해 준 최소한만 지키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중대재해를 크게 줄일 수 없다. ‘필요한’ 기준, ‘충분한’ 정도에 대한 판단의 주체는 국회와 정부가 아니라 위험 통제의 책임이 있는 사업주이다. 업종과 사업장의 특성을 감안해 위험의 크기와 이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기술·비용·시간 등의 곤란함을 비교하고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는 노력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사업주의 태도가 요구된다.

법률 전문가도 안전보건법령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가 “통상의 판단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가”를 명확성에 대한 기준으로 제시한 바가 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형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너무 매몰돼 안전보건법령을 재단하는 것은 너무 경직된 견해다. 안전보건법령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특수성을 인정하는 견해를 갖춘 법률 전문가의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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