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훈 공공연대노동조합 위원장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돌봄도 민간이 주도해 고도화하겠다는 정책을 지난달 15일 발표했다. 아니 지금도 대부분의 돌봄이 민간에 맡겨져 있는데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민간에 맡기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성가족부 폐지와 여러 퍼즐들을 맞춰 보니 윤석열 정부가 바라는 민간주도의 실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여가부에서 운영 중인 아이돌봄 서비스가 있는데, 김현숙 장관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누가 서비스를 제공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발언을 했다. 돌봄을 정부에서 제공하지 않아도 좋은 서비스면 민간에서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여가부는 지난달부터 아이돌봄 자격관리제를 시범시행하면서 민간의 아이돌봄 종사자들에게도 80시간의 교육이수를 통해 자격증을 발행할 계획이다. 서비스 연계가 잘 안 된다는 고질적인 문제를, 정부의 연계 강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민간의 돌봄서비스 연계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민간 아이돌봄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만이었던 돌보미 신분에 대한 신뢰문제는, 정부가 자격증을 발행하고 정부 돌봄에 비해 비용 부담이 되는 부분은 지방정부 등을 통해 지원하는 방향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돌봄은 당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당장에는 이용자 가정의 돌봄공백이 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더 많은 서비스를 더 저렴한 자격에 공급한다는 논리는 결국에 종사자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종사자들의 근로조건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은 이미 수십만에 달하는 노인요양시설과 어린이집 보육시설 운영에서 검증된 바 있다. 민간에 맡겨진 요양과 보육은 장기노인요양보험 재정과 정부 재정으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면서도 돈벌이와 이윤 추구에만 눈먼 시설 운영과 부정·부패·비리, 돌봄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근간으로 한 돌봄의 비정상화를 만들고 말았다. 그나마 정부에서 공적으로 운영 중이던 아이돌봄마저 이제 민간에 넘겼을 때 결과는 이미 예측돼 있다.

아동돌봄만이 아니다. 급격한 초고령화 진행과 독거노인들의 고독사가 증가, 노인병원의 의료비 부담이 국가적 과제가 되면서 정부는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통해 50만명의 노인에게 안부 확인과 생활 지원 등의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 역시 99%가 민간기관에 위탁돼 운영 중이다. 한 달에 80여곳의 가정을 방문하고 월 12시간의 안부전화를 본인 휴대폰으로 해야 하는데도 아무런 비용지원이 없다. 이러다 보니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수행기관은 서비스 실적을 채우기 위해 굳이 대상이 아닌 사람도 선정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장애인활동지원사 역시 10만명 가까운 지원인력이 고용돼 활동하고 있지만 거의 민간기관에 맡겨져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지급하는 활동수가가 낮아 정작 필요한 시간에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정보통신기기와 로봇을 활용해 노인·장애인 돌봄을 한다고 언론에서 떠들썩했던 응급안전안심서비스. 하지만 가정에 공급되는 기계 중 상당수는 고장나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결국 AS 처리 등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이를 관리하는 관리요원은 부족했다. 처우가 열악해 전체 600여명 중 1년에 절반이 그만두는 현실임에도 기획재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삭감했다. 기계가 돌봄의 일부를 대신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기계는 사람이 돌봐야 한다는 것은 평범한 진실이다.

영유아 보육을 담당하는 국공립 어린이집은 그동안 꾸준히 늘린다고 한 게 전체 중 20%인데, 그마저도 민간 원장에게 위탁된 게 대부분이고 실제 정부에서 운영 중인 것은 2.5%에 불과하다. 보육교사들이 쉬지도 못하고 휴가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태를 해결하고자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 대체교사들을 고용해 파견하고 있다. 그런데 육아종합지원센터마저 민간에 위탁돼 있다. 대체교사를 1년도 아닌 6개월·8개월 단위로 채용하다 보니 대체교사 수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힐러리 코텀이 <래디컬 헬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돌봄을 서비스로, 이용자 선택권으로 보는 관점은 지난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시각에 기초한 정책이다. 감염병 위기가 일상화한 현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모든 노동이 종사자의 처우와 연관이 있지만, 돌봄노동이 다른 노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돌봄노동은 인간 간의 상호관계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인다. 그런 면에서 종사자에 대한 존중과 처우가 서비스의 질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돌봄을 누가하든 제공만 하면 된다는 방식은 현재 최저임금으로만 충당하는 일자리, 여성·고령층으로 편중된 불평등한 노동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제는 이주노동자까지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어떤 서비스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제공하는가도 당연히 중요하다. 대다수가 민간에 맡겨진 전달체계는 종사자들에게 고용불안과 갑질이라는 또 하나의 굴레를 씌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용자들에게 나쁨 돌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지난 20여년간 한국 사회 복지전달체계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를 더 확장하자고 하는 셈이다.

때마다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 터지는 안타까운 사망사고들은 돌봄이 본인이 신청하면 받는 서비스가 아니라 정부가 제공해야 하는 보편적 권리여야 함을 보여준다.

정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돌봄은 충분히 민영화돼 있다. 오히려 공적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소명이다. 그런데도 이를 역행하고 있는 현 정부의 민영화는 그래서 중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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