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전대미문의 급작스러운 이동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었건만, 장 발장은 도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즉 뚜껑 하나를 쳐들었다가 다시 닫는 사이에, 대낮에서 완벽한 암흑 속으로, 정오에서 자정으로, 요란한 굉음에서 고요 속으로, (…) 극도의 위험에서 가장 절대적인 안전함 속으로 건너갔다.”(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중)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중 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도로 도망가는 장면이다. 위고는 수십 페이지에 걸쳐 파리 하수도의 역사와 실태를 해부하고,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현재 파리 하수도의 총연장은 2천400킬로미터에 달한다. 파리의 땅속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하수도에는 수로뿐만 아니라 난방·가스 파이프라인, 통신케이블 등 각종 설비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문명을 가능하게 한 거대한 구조물이자, 또 하나의 문명이다. 위고의 말처럼 ‘파리의 땅 밑에는 또 하나의 파리’가 존재한다.

우리 역시 다를 거 없다. 2020년 기준으로 전국 하수도 보급률은 94.5%다. 1980년에 10%가 채 안 됐으니 천지개벽 수준이다. 서울만 떼어 놓고 보자면, 매설된 하수도관은 약 1만킬로미터고, 상하수도관·통신선·가스관·전력선·지하철 등 지하시설물의 총연장은 5만킬로미터가 넘는다. 한반도 최남단 마라도와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의 직선거리가 1천146킬로미터임을 고려했을 때,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서울의 땅 밑에도 또 하나의 서울이 있는 셈이다.

지난 8월의 기록적인 폭우와 곧이어 닥친 태풍 ‘힌남노’는, 항상 거기 있었으나 거기 있는 걸 잊고 지냈던 지하 세계의 존재를 비췄다. 배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했고, 바퀴벌레 떼가 출몰했다. 반지하·저지대 주택과 지하 주차장, 지하철 등이 침수됐다. 그로 인해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가 있었다.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잘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햇빛이 비치는 지상을 언제나 떠받들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의 탐욕은 지나쳤다. 지하 세계는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실은 위기 속에서 드러났다.

탐욕이 불러온 위기 앞에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순서는 있었다. 약자부터였다. 지하철 청소노동자는 폭우로 잠긴 역을 복구해야 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 일은 고됐다. 감전과 붕괴, 미끄러짐 등 각종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소상공인·자영업자는 폭우로 밥벌이를, 반지하·저지대에 거주하는 주민은 집을 잃었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는 취약계층에게 집중됐다.

비구름이 지나가고, 지상에 다시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지하 세계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 누군가는 오늘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각종 맨홀을 비롯해 밀폐된 지하실, 오래된 우물, 보일러, 사료·양조·분뇨탱크 등 수많은 지하·밀폐 공간을 유지 보수하는 노동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오물과 악취, 유해 가스가 가득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매년 질식·수몰·추락·폭발·교통사고 등으로 죽거나 다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산재 예방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은 거의 없다. 기본적인 노동실태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지하 세계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어서 그런 것인가?

지난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주최한 ‘11회 비정규노동 수기공모전’ 당선작 <작은 것이 작게 느껴지지 않는 삶>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맨홀을 열다 보면 희한하게 ‘향기’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 더러운 물인데 향기가 난다. 세제와 샴푸 향이 더러운 물의 악취마저 감추고 있다. 이때 참 웃기다. 오물로 가득한데 내가 샤워할 때 나던 향, 밥그릇에서 오늘도 맡았던 향이 난다. 향기로운 독극물. 나는 악취인지 향기인지 모를 냄새를 맡으며 하수도를 점검한다.”

그렇다. 지하의 오물은 지상의 향기와 다르지 않다. 향기가 흘러 오물이 됐다. 우리는 ‘향기로운 독극물’ 위에 서 있다. 이제는 지하 세계를 온전히 마주해야 한다. 언제까지고 외면할 순 없다. 정부는 침수 취약지역인 강남역·광화문·도림천 등지에 거대한 빗물 배수시설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효과적인 수해 예방책이 되길 바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결국 지하 세계를 더 넓히는 꼴밖에 안 된다. 지하로 흐르는 우리의 탐욕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절제할지, 어둠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할 방안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비단 지하 세계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은 빈 공간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그것은 지하뿐만 아니라 강으로, 바다로, 하늘로, 가상공간으로, 우주로 퍼져 나간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에 발맞춰 지하철 노선을 신설·연장하고, 하늘에 화학물질을 뿌려 비구름을 유도하며, 가상공간에 금융·부동산·게임·공연·교육 등 각종 산업을 씨줄 날줄로 엮고,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 탐사선을 쏘아 올리지 않는가. 이는 위대한 인류 성취의 한 증거이기도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 탐욕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섬뜩하게도, 사방에서 향기가 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