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다가오는 토요일(17일), 지역 고려인 이주민들과 노동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두 달 전 계획한 일정인데 여전히 무슨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고 어둡다. 떠나온, 돌아온 땅에서 마주한 차별과 소외, 불투명한 근로계약과 다단계 하청구조, 장시간 고위험 비정규노동의 굴레, 주거와 돌봄 불안정과 공백들. 한국 사회 이주민, 고려인들이 마주한 일과 삶의 소외는 개인의 의식과 의지로만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야만이다. 부당함과 서러움을 늘어놓는 것 말고 어떤 대안을 말할 수 있을까. 함께 묻고 다투고, 모이고 싸우자는 대안이 공허하고 서럽다. 선언을 넘어 우리는 어떤 책임과 실천을 다할 수 있을까.

고려인은 넓게는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비에트연방 국가에 주로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인 동포들을 의미한다. 관계법령에서는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의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 및 구 소련지역으로 이주한 자 및 민법 777조에 따른 그 친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의 한국 사회 이주는 2000년대부터 뚜렷이 증가하고 있다. 소련 해체 뒤 발족한 독립국가연합의 정치적·경제적 불안들과 대비되는 한국의 성장, 2007년 중국과 옛 소련지역 고려인 동포 대상 방문취업제가 도입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다.

법무부 출입국통계에 따르면 2020년 4월 기준 국내에는 8만5천명 이상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이들이 한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노동’이다.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가족들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기대였던 것. 그러나 돌아온 한국 사회에서 고려인 이주민들 대다수가 저임금 불안정노동에 내몰려 있다.

충남지역에는 전국 고려인(8만5천명)의 약 18%(1만5천명)가 거주하고 있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지역 고려인 노동권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응답한 충남 내 고려인 노동자의 54.5%는 비정규노동에 종사했다. 근무기간도 1년 미만이 46%를 차지해 고용이 매우 불안정했다.

이들 중 79.9%는 제조업 공장노동자였다. 65.8%는 전문대 이상 고학력자였고, 심층면접 결과 한국 사회로 이주하기 전에는 전문직에 종사했던 비율이 높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험들이 인정되지 않고 한국어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어 10명 중 7명은 단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절반에 가까운 고려인들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근로계약 내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 곳의 고용주와 직장 이름, 주소, 전화번호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몰랐다는 응답이 48.7%를 차지했다.

한편,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의 사업주와 임금을 지급하는 곳이 다르다는 응답이 58.9%로 절반 이상이 간접고용 형태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때문에 임금체불·부당해고 등 노동권 침해가 발생했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구체적 노동조건을 살펴보면 응답자의 33.2%가 주당 52시간 이상 일했다. 전국 임금노동자 평균에 비해 9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고려인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0.5시간으로 전국 임금노동자보다 13시간 이상 많았다.

그러나 임금 수준은 오히려 낮았다. 고려인의 월평균 임금은 220만원 수준으로, 전국 임금노동자 평균인 274만원, 충남 임금노동자 평균인 272만원과 비교했을 때 50만원이나 더 적었다. 더욱이 코로나19 영향으로 절반 이상이 임금 감소를 경험했고 월평균 100만원 이상의 소득이 줄어들었다.

노동안전 문제도 심각했다. 33.3%가 일하다 다치거나 아픈 경험이 있었지만 그중 98.7%는 산재보상을 신청하지 못했고, 절반 이상이 본인이 돈을 내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병원에 가지 못한 경험도 35.1%나 됐다. 응답자의 65.9%는 1개 유형 이상의 노동인권 침해를 경험했다. 욕설과 폭언(51.5%), 차별(36.7%), 임금체불(34.5%) 경험이 다수였다.

고려인 (귀환) 이주민의 일과 삶이 안정되려면 다문화가족지원 정책과 이주노동 정책, 출입국 정책이 분절돼 있는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이주민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체류의 불안정성을 해결할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고려인들 다수가 방문취업비자 혹은 동포비자 자격으로 한국 사회에 거주하고 있는데 방문취업비자는 3년 기한으로 출입국을 반복해야 하는 등 체류에 대한 불안정성이 매우 크다. 동포비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하지만, 자격을 얻는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불합리한 요소가 많다.

충남의 외국인 주민 비율은 전국 1위 수준으로 이미 2018년 다문화·다인종 사회에 진입했다. 선주민과 이주민 구분을 넘어서, 국적과 인종에 따른 구분과 차별 없이 고려인을 비롯한 지역사회 이주민들의 안정적인 정주를 위해 노동·가족돌봄·문화적응 등 현실의 여러 문제를 아우르는 통합적 지원 정책이 중요하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적 역사를 다룬 장편소설인 <떠도는 땅>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가진 씨앗을 받아 줄 땅을 찾아간다.”

고려인들의 한국 사회 이주는 여러 세대에 걸친 비극적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끝내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터전을 찾아온 일종의 귀환이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근현대사의 여러 비극과 맞닿아 있다. 결국 국가권력이 구성원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고려인들은 과거 우리 사회의 시민인 동시에 현재의 시민이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유보됐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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