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난 2월 밀레니엄힐튼서울호텔(힐튼호텔)의 새 주인이 된 이지스자산운용은 올해 말 호텔 영업 종료를 앞두고 호텔 직원들의 고용을 보장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매도자와 매수자, 노조가 고용승계와 노조활동 보장을 두고 3자 협의체를 구성해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코로나19 이후 호텔업계에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진 만큼 이번 합의는 호텔 주인이 바뀌어도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선례로 남을 수 있다.

물론 매각 이후 재고용을 보장하기까지는 지난한 협상 과정이 있었다. 지난해 3월 매각설이 퍼지고 나서 호텔측이 매각 계획을 철회하며 한 차례 무산됐다가 같은해 10월 인수 협상을 재개하면서 노조의 매각 저지 투쟁도 1년 넘게 이어졌다. 최대근(51·사진) 관광레저산업노조 위원장 겸 노조 밀레니엄힐튼서울호텔지부장은 “(합의 배경에는)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리스크에서 파트너로 전환된 과정이 있었다”며 “호텔업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노하우가 중요한 만큼 전체 종사자의 고용보장이 기업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힐튼호텔 안에 위치한 노조사무실에서 최대근 위원장을 만나 재고용 합의에 대한 평가와 계획을 들었다.

“최대 쟁점 고용·단협승계였는데 모두 보장하기로”

- 1년 넘게 이어 온 매각 관련 투쟁이 최근 합의를 도출하며 마무리됐다. 그간의 경과와 소회를 묻고 싶다.
“지난해 3월 매각 추진 사실을 기사를 통해 확인하고 3개월간 투쟁 끝에 호텔측이 같은해 6월 매각 계획을 공식 철회했다. 그런데 3개월여 만에 다시 매각 이슈가 불거졌다. 매수자·매도자를 통해 확인해 보니 매각 과정에서 ‘노조 리스크’를 누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부담할 것인가가 매각의 결정적 키(Key)였다. 매수자 가운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곳이 없어 무산됐다가 이지스자산운용이 나서면서 매각이 결정된 것이다. 1년 넘게 정말 힘들었는데 노조의 투쟁, 시민단체와 언론의 관심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합의를 이뤄 낼 수 있었다.”

- 3자 협의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무엇이었나.
“초기에는 2027년 준공 예정인 복합단지에 호텔이 포함되지 않았다. 호텔이 포함돼야 고용이 승계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가장 큰 쟁점이었다. 호텔을 포함시킨 다음에는 단협승계가 문제가 됐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사용자에게 현재의 단협을 어떻게 100% 승계하도록 하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1개 조항을 제외하고 결국 거의 대부분 승계하기로 합의했다. ‘유니언숍이냐, 오픈숍이냐’는 재논의하기로 노조가 일정 정도 양보했다. 고용·단협승계가 보장된 상태에서 상생안과 보상안 이야기로 넘어갔다. 현재 700개 정도의 객실이 5년 뒤에는 200개 정도로 줄어들고, 공사기간 동안의 공백을 고려해 노동자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상생안과 보상안을 제시하고 직원들이 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상생안을 택하면 5년 뒤 5성급 호텔에 재고용된다. 공사기간 동안 매월 평균임금의 78.4%를 지급받는다. 보상안을 택하면 본인 평균임금의 40개월치를 퇴직 보상금으로 받는다. 힐튼호텔의 상시근로인력은 670여명인데 이 중 430여명이 정규직이다. 430여명 가운데 89명(20.7%)이 상생안을 택했다.

“상생·보상안, 사측의 시혜 아닌 당연한 권리”

- 이번 합의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재고용을 보장한 것, 공사기간 동안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생금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성과다. 5년간 경력이 단절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라면 자영업을 포함한 다른 경제활동이 가능하고, 직무교육도 제공된다. 보상안은 입사 연도와 무관하게 평균임금의 40개월치를 지급하기로 한 점이 성과다. 보통 직급이 높고 오래 일할수록 보상금이나 위로금을 더 많이 받는데 그 격차를 줄였다. 올해 말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모두 근무하고 난 다음 상생·보상안을 적용받기로 해서 보상안을 택한 사람 입장에서는 재취업 준비로 조기 퇴사를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수 있다.

일각에서는 ‘회사를 잘 만났다’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사측이 시혜를 베푼 게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보장받은 것이다. 회사가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고파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계약직이나 협력업체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2년 미만 근무한 계약직이 30여명인데,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조건에서 상생·보상안을 선택할 수 있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실업급여에 준하는 보상금을 노조가 요구했지만 협상 과정에서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 공사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고, 완공 이후 고용 주체가 합의를 뒤집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딱 5년간 상생금을 받는 게 아니다. 공사기간으로 지급기간이 명시돼 있고, 공사기간은 복직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또한 이지스자산운용이 건물을 세우고 호텔 임대를 할 때 임대조건으로 상생안을 택한 89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단협을 승계한다는 내용을 내세울 것이다. 그럼에도 합의를 뒤집을 경우 200억원을 위약벌(채무 이행을 확보하기 위해 약정한 벌금)로 명시해 강제력을 담보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업계 종사자 보호 위해 산별노조 역할 절실”

- 공사기간 동안 노조활동은 어떻게 이어 나갈 계획인가.
“합의안에는 현재 회사에서 노조에 지원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활동을 지원한다고 명시돼 있다. 공사기간 동안 서울역 주변에 노조사무실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모든 비용은 이지스자산운용이 책임진다. 공사가 끝나면 노조사무실은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사업계획은 다시 논의해야겠지만 노조의 많은 활동 중에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활동만 당분간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대체 뭘 하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5년간 이 대오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조 틀 안에서 계속해서 조합원들이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모이고, 연대하고, 학습하고, 투쟁하고 이런 것들을 예전보다 더 자주,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 호텔·관광업계 구조조정 문제는 힐튼호텔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과 노조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재난시기 정리해고를 방지할 만한 보호법이 마련돼야 하고, 현행 관광진흥법에 산업발전만이 아니라 종사자 보호와 지원에 대한 근거 규정이 포함돼야 한다. 호텔업계는 코로나19에 따른 구조조정, 만성적 고용불안과 저임금으로 인해 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노조 조직화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소규모 사업장, 간접고용 비중이 높은 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산별노조가 필요하고, 관광레저산업노조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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