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끝난 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 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손해배상·가압류’가 다시 화두다. 정부가 불법파업에 대한 손배청구 필요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손배·가압류는 노동자와 노조를 옭아매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험해 본 노동자들은 잘 알고 있다. 손배·가압류가 노동자들의 숨통을 어떻게 조이는지.<편집자>
 

고동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외협력실장
▲ 고동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외협력실장

무더웠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여름이었다.

하늘에선 헬기가 굉음을 내며 떠다니고 있었고, 공장 주변엔 경찰들이 완전군장 차림으로 도열해 있었다. 대통령과 정부 각료, 보수정당 국회의원은 불법·폭력 낙인을 찍고 파업을 그만두라 협박했다. 자신들이 세웠던 민주정부라 참칭했던 정당은 노사 모두 양보해서 사태를 해결하자고 촉구했다. 언론에서는 불법파업으로 인한 손실로 몇천억원의 숫자를 나열하며 ‘공권력 투입 임박’이라는 자막방송을 24시간 내보냈다. 경찰은 파업노동자들에게 출석 요구서를 발송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기업이 저지른 방만한 경영과 불법과 폭력은 신기루같이 사라지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는 불법과 폭력파업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기업은 양보하듯 마지막 협상안을 내민다. 노동자들의 무조건적인 항복협상안이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어느 한 곳 기댈 곳이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2022년 대우조선해양 거제조선소에서 벌어진 이 기막힌 일들을 우리 모두 목도했다. 헌법·근로기준법, 정부 시행령 어디에도 없는 이 매뉴얼은 정부가 바뀌어도, 시간이 지나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작동했다.

노동자들에게만 굴욕적인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 구속영장을 청구한 파업노동자들에겐 불법과 폭력의 낙인이 그대로 법적 판결로 이어진다. 이를 근거로 평생을 일해도 갚지 못할 돈을 파업노동자들에게 내놓으라고 판결해서, 노동조합 활동하고 파업하면 ‘인생 종친다’는 공포를 확산시킨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면 일자리도, 앞으로 살아갈 희망도 다 앗아가 버리겠다는 본보기다.

쌍용차 사태 이후 수많은 사업장에서 이어진 노조파괴 사례는 이를 방증한다. 아마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 이후 수많은 사업장에서 정부와 자본이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사례가 이어질 것이다. 오로지 기업하기 좋은 나라만을 위한 정부와 자본의 매뉴얼은 그래서 이제 시작이다.

2009년 쌍용차 사태 이후 30명의 해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해고에 따른 스트레스 질환으로 죽어 갔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죽음으로 ‘해고는 살인’이라는 비극을 증명해 갔다. 살아남은 해고자들은 복직했지만 아직 수십억원의 손배·가압류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쌍용차에서 해고되고 10년 만에 복직한 51세의 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어렵게 복직된 지 4년 만에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고, 한 달을 병상에서 버티다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2009년 파업에 따른 손배·가압류 대상자였다. 복직한 노동자들 중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뇌출혈·심정지 등으로 죽거나 입원해서 치료받고 있고, 각종 암 투병 중이다. 이는 끝난 것 같았던 쌍용차 해고자들의 죽음이 여전히 이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왔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손배·가압류 걱정을 토로하던 그의 죽음은 ‘손배·가압류도 살인’이라는 증명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노사 모두의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처벌하겠다던 윤석열 정부는 오로지 대우조선 비정규 노동자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다. 그래서 대우조선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쌍용차에서 이어진 죽음을 다시 대우조선에서 확인하고 싶지 않다면,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선 투쟁을 파업 당사자들에게만 맡겨 둬선 안 된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가로막는 손배·가압류라는 국가폭력에 대해 침묵한다면 쌍용차 사태 이후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지 모른다.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윤석열 정부 대응이 노동자 길들이기의 신호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에 걸맞은 투쟁의 봉화를 올릴 차례다. 대우조선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질 경우 우리도 모든 것을 걸고 총파업 총투쟁으로 나서는 것이 0.3평 철재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유최안 동지의 투쟁에 화답하는 길이다.

노동자가 살 만한 세상은, 아직 어렵지만 다시 우리가 단결하는 것에 있다. 자본과 정권의 단결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단결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좌고우면하지 말자. 우리에게 희망은 여전히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총파업 투쟁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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