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2일 삼성전자서비스 해고 노동자인 고 정우형(54)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2015년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해고된 뒤 복직투쟁을 해 오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동료와 가족은 고인이 노조파괴 희생자라며 삼성의 공개사과, 배상, 고인을 포함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편집자주>

차용택 전교조 해직교사
▲ 차용택 전교조 해직교사

“해군 출신이라서 이렇게 걸어 보긴 처음이에요.”

군에 다녀온 사람이면 대부분 먼 거리 행군을 해 봤을 것이다. 그래서 발에 물집이 잡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그런데 그는 물집이 잡힌 채로 그 아픔을 참아 가며 뜨거운 아스팔트를 걸었다. 물집에 실을 두 줄 끼워 두라고 하자, 해군 출신이라 오래 걸어 본 적도 없어 물집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며 씩 웃었다. 참으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이었다.

함께 며칠 걸으며, 정확하게 말하면 걷는 그를 뒷바라지 하면서, 또 한번 그의 웃음을 봤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이 태어났다는 동네 근처를 지나게 돼 점심도 먹을 겸 이병철이 태어난 집에 가 봤다. 내가 장난스럽게 그 집 표지판에 발길질을 하는 자세를 하자 그는 사진을 찍어 주며 씩 웃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렇게 슬픈 웃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와 인연은 그가 삼성전자서비스 해고자 복직투쟁의 하나로 온 나라를 걸을 때 시작됐다. 내가 사는 동네 가까이를 지난다기에 그날 출발지점이라는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에 가 봤다. 걷는 사람이 각오를 말하고 동료 노동자들이 환송하는 그런 출정식을 할 줄 알았다. 교사들이 교육혁명을 내세우며 전국대장정을 할 때도 날마다 그 지역 교사들이 결합해 출정식을 했고, 다른 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전국을 걸을 때도 현지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걸 봤던 터라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혼자였다. 투쟁을 드높이는 노래도 없었고, 구호도 없었고, 동료 노동자도 없었다. 작은 깃발이 꽂혀 있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삼성전자서비스 해복투’라 쓰인 커다란 깃발을 세우고 있는 그의 빛나는 눈빛만 있었다. 응원하러 왔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혼자 가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어서 경남 땅만이라도 함께하자는 마음으로 구미까지 내 트럭으로 그를 엄호(?)했다. “나를 동지라 생각하면 대신 걷게 해 달라”고 떼를 써서 하루는 내가 걷기도 했다. 우리의 짧은 인연이 시작됐다.

혼자 걷는 그는 참 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해복투가 그에게는 든든한 조직이었고 해복투 동지들에게 형제보다 끈끈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동지들은 일을 하느라 함께 걷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을 찾아서 걷는 길을 잡아 주고 식당과 숙소를 예약해 줬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달려와 함께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기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들이 해고자의 길을 갈 수 있게 응원해 준다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가 힘들고 어려운 해고자의 길을 가면서 강직한 원칙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이 해복투 동지들과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인연은 좀 더 이어졌다. 내가 사는 곳 함양의 이웃 동네인 남원에 그가 온 것이다. 귀정사의 도움으로 냉동설비 업체를 개업했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난로 연통을 달면서 그는 행복해 보였다. 한 달쯤 뒤 귀정사 쉼터에서 만나 대화할 때도 그는 특유의 원칙을 강조하며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모습이었다. 함양에 아는 사람이 에어컨을 설치해야 해서 그를 소개했고, 나는 그의 조수가 돼 함께 설치했다. 그는 경차에 관련 기계와 도구들을 가득 싣고 다녔고 꼼꼼하고 진중하게 에어컨을 설치했다.

그가 오랜 투쟁에 지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으리라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노조에서 투쟁을 외면당해서 외로워서 그랬을 거라고도 한다. 내가 아는 그는 지친 사람이 아니었다. 해군 출신이라 오래 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그가 천리를 걸었고, 쉼터에 있으면서도 투쟁이든 삶이든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업장 안에 삼성전자서비스 해복투 깃발을 걸어 놓고 복직 투쟁을 놓지 않았던 그가 지쳤을 리가 없다.

그는 투쟁의 방법으로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백내장 수술을 했다며 선글라스를 끼었다. 손가락 수술도 종양 제거 수술도 했다고 했다. “가족 때문에 했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투쟁 현장에서 뵐게요”라고 했다. 그런 그가 삶에 지치거나 외로웠다니.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사과를 받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제 난 무엇을 해야 하나?” “당연함에 목숨 걸어야 한다는 게 웃기죠”

그가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재용에게 “사과하라”고 보낸 편지가 되돌아오자 그는 다음 투쟁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재용에게 사과를 받는 가장 적극적인 투쟁 방법.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유서를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서를 읽는 나는 전태일을 떠올렸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나를 화장해 삼성에 뿌려 달라!” 제 몸을 불사르는 마음으로 썼을 유서.

정우영 열사와 이승에서 맺은 인연은 짧게 끝났지만, 아직 나는 그의 명복을 빈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 해복투 노동자들이 복직되는 날, 잘 가시라 인사할 것이다. 그와 맺은 인연은 해복투와 함께, 온 나라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이어 갈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