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이상한 직업의 앨리스

입사와 함께 바로 간부가 되는 신입사원이 있다. 수만명 혹은 수십만명 조합원이 소속된 지역과 전국단위 노조에 채용된 사무처 신입이 그렇다. 차장이나 부장의 직함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차장이나 부장이라면 경력도 끗발도 꽤 있다. 그런데 신입사원이 부장이 되는 일이 노조에 흔하다.

군사독재 시절에 꽤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199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민주노조들이 정착했다. 민주노조들이 지역과 전국을 연결해 상급단체를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활동하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현장 활동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경력을 인정해 간부 직책을 달게 됐다. 한편으로는 상급 단위인 만큼 끗발을 가질 수 있게 직책을 부여하는 것도 필요했다.

이젠 지역이나 전국단위 사무처 간부는 현장 경험이 없어도 채용한다. 신입이지만 관행대로 차장이나 부장 직함을 얻는다. 상황이 달라진 이제는 사무처 신입이 더 낮은 직급으로 시작해야 할까. 아예 발상을 바꿔 ‘부장-국장-실장’ 같은 수직 위계를 없애고 수평 관계로 바꿀 수도 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김프로’ ‘이프로’와 같이 전문가를 의미하는 ‘프로페셔널’을 줄인 호칭이 기업에도 퍼졌다. 수평 관계를 지향하는 노조야말로 생각해 볼 문제다.

호칭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노조 사무처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듣는다. 얘기하는 사람마다 다른 각도로 얘기한다. 그들을 채용된 직원, 노조간부, 사회에 공헌하는 활동가, 사회를 바꾸는 혁명가, 특정 정파에 소속된 정치가 등 다양한 각도에서 얘기한다. 이들은 공식 직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일반적 직업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직업의 앨리스’라고 할까. ​

상승과 하락을 지나온 사람들

민주노조는 홀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했다. 현장에서 투쟁이 확산하기 시작한 1980년대와, 노조탄압과 정착을 위한 분투가 벌어진 1990년대는 노동계급의 투쟁 열기가 상승하는 시대였다. 외환위기를 맞은 후 2000년대는 하락의 시대가 쭉 이어졌다. 탄핵촛불이 타오르던 2016년을 계기로 반등의 계기가 왔지만 노조가 조금씩 늘었을 뿐 분명한 재상승의 시대가 오지는 않았다.

‘상승의 시대’를 반영한 노조의 강령을 보면 혁명적 열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노조가(歌)는 민중의 선봉에 서서, 죽음의 사선을 넘어, 평등한 나라를 쟁취하겠다는 혁명적 가사로 꽉 차 있다. 민주노조 초기의 사무처 간부들은 그런 혁명적 실천과 문화를 고스란히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사무처가 ‘직원이냐, 혁명가냐’는 질문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동지’였다.

‘하락의 시대’에 노동자는 자본주의를 뒤집을 혁명계급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자본주의 시민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도 했지만 충돌도 일어났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노조 사무처에 ‘패거리’나 ‘노조 안의 노조’도 생겼다. 혁명가나 동지로서 정체성이 약화한 사무처 간부들이 선거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패거리’가 되기도 하고 혹은 노동조건을 지키려는 직장인으로서 동질성 때문에 ‘노조 안의 노조’를 만들게 된다.

오래된 혁명 투혼이 세월에 휩쓸려 나간 사무처에서 서로 다른 집행부를 세우려는 경쟁이 반복했다. 그렇게 뽑힌 지도부는 일부 사무처와는 호흡이 맞지만 다수 사무처 간부들과 돈독할 수 없다. 사무처와 지도부 사이에 갈등도 생긴다. 그래서 채용된 사무처 자신을 보호할 상조회나 그것을 넘어선 노조도 생겼다. ‘상승의 시대’를 경험한 고참이 신참의 임금만 따박따박 받고 칼퇴근하는 모습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최근에도 들었다. 신참들이 보기에 그런 고참은 꼰대로 보일 것이다. 흔한 세대 갈등일까.

재현과 순응

“너는 생계형 아니야?” 현장 투쟁을 경험했고 민주노총에서 활동하다가 동해안 어딘가에 사는 선배가 벌써 10여년 전에 내게 했던 질문이다. 우리는 혁명을 품고 함께 활동했지만, 이제 너는 생계를 위해 노조에 상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살짝 모멸감이 올라왔다. 파고들면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사무처 간부의 두 갈래 모습을 본다. 하나는 혁명성과 전투성을 되살려 보여주려는 ‘재현’이고 다른 하나는 점점 고용된 직원이 돼 가는 ‘순응’이다.

‘재현’의 모습을 분명하게 일깨워 준 것은 87년 투쟁을 겪은 바로 다음 세대 간부다. 이들은 함께 활동한 윗세대 모습을 봤고 무용담을 들으며 그런 모습을 선망한다.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성과는 별로 없기에 과거 혁명성과 전투성을 선망하며 이를 복원하고픈 욕망이 강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과거의 꿈에서 깨지 못한 ‘미몽 세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재구성되고 새롭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혁명과 전투는 고스란히 반복되지는 않는다.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서로를 ‘프로’라고 부르는 흐름에도 뒤진 조직문화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평등을 지향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수직 문화는 뿌리 깊다. 이런 문화는 정규직 중심의 위계와 하청노동자를 한 끗발 아래로 대하는 태도와 어울린다. 그러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공격하는 사건이라도 나면 이미 늦다. 그 사건은 자신이 가진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직업정신을 가진 프로

“우리는 직장인이 아니라 활동가입니다.” 사무처 중에 임금을 따박따박 받지만 열정을 쏟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직장인과 활동가를 대비하면서 활동가로서 소명이나 혁명적 투혼을 가지라는 얘기다. 잘 먹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활동가를 높게 보고 직장인을 낮춰 보는 직장인 비하다. 직장생활을 대충하는 사람들 별로 많지 않다. 직장인 대부분이 열심히 직장생활을 한다.

아마추어는 취미처럼 삶의 일부만 투여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삶을 투여해 직업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프로’다. 노조에 취직한 사무처 간부는 노동권을 지키고 확장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래서 노조 사무처 간부들은 ‘노동권 프로’다. 사업장을 연결하는 지역과 전국의 사무처는 관계의 교차점이다. 그래서 각종 사건을 듣고 보고 경험하는 공간이다. 이런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해석하며 내공을 축적한다.

사무처 간부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에 적합한 ‘직업정신’이다. 노조간부의 직업정신은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권과 노동권의 가장 중요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전투력이나 조직력과 같은 물리력 이외에 중층적으로 분절된 노동 현실에 맞는 정책이나 점점 중요해진 심리적 요소 같은 다양한 소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프로 선수가 국제대회나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권 고수가 되지 않아도 좋다. 노조에 취직해서 일하는 것만으로 노동권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소유를 향해 내달린다. 그런데 노동권을 위해 기여하는 것은 뭔가 다르다. 그래서 소중하고 멋진 일이다. 수많은 노조 간부들이 ‘노동권 프로’로서 자부심을 알차게 키워 가기를 응원한다. 화이팅!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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