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해가 저물고 낮 동안 달궈졌던 땅이 식었다. 바람 방향이 바뀔 때다. 그러나 거제조선소 미처 식지 않은 철판 위에 한 사내가 웅크린 채 꿈적을 안 했다. 사태의 향방을 알 길 없는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어 큰 배가 머문 잔잔한 바닷물을 오래 살폈다. 철퍼덕 앉아 다 식은 찐 감자를 나눴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워 그라인딩 작업 소리를 듣다간 혀를 찼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수십년 롤러 질에 휜 손가락이, 그라인더에 패인 흉터 많은 손이 거기선 흔했다. 옆 블록에 올라 맞불 농성하던 정규직이 내려왔다. 불법파업 중단을 외치느라 목이 다 쉰 그가 길 가운데 청테이프로 선을 그었다. 넘어오지 말 것을 종용했다. 하청노동 설움 얘기 풀어내느라 목이 다 쉰 도장공 아지매는 기어코 눈이 붉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한바탕 웃고 말았다. 말없이 가만 섰던 무뚝뚝한 표정의 발판공 아재가 선을 확 잡아뗐다. 그 시각 금속노조 탈퇴를 위한 투표가 한창이었다. 파업에 따른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를 내세우는 기사가 줄줄이 떴다.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대응, 정부 입장이 속보로 나왔다. 경찰 헬기가 하늘을 날았다. 머리띠 맨 업체 사람들은 하퀴벌레로 불렸다. 하청과 바퀴벌레를 붙인 말이다. 선을 넘는 일에 늘 따라붙던 장면이다. 선을 넘지 마시오, 분단된 땅에서 웃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선 그어 나뉜 현장에서 전선은 흐릿해지곤 한다. 누군가의 바람대로다. 선을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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