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학문은 왜 존재하는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진리는 나의 빛’(베리타스룩스메 veritas lux mea)이라는 단어를 모토로 삼고 있는 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진리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 대학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딱 한 분 있었다. <자본론>을 우리말로 번역한 그가 정년퇴임한 후 그 대학에서는 그의 후임자를 뽑지 않았다.

마르크스 경제학만이 진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수만명의 경제학자들이 있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만도 수십명인데도 부르주아 경제학은 어찌해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15년째 계속되고 있는 장기불황에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가.

상품의 가치가 효용에서 나온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효용가치설부터 가짜 진리다. 조금은 양심이 있었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새뮤얼슨은 상품의 가치를 효용에 의해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 대학에서는 계속 미시경제학에서 효용가치설을 가르쳤다. 그것을 배운 사람들이 한국 경제를 관리해 왔다.

상품의 가치는 소비자의 효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효용가치설과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가치설 가운데 어느 것이 진리인가? 제주 삼다수는 어째서 2리터짜리 한 병에 1천원이며, 마시지 않으면 곧 숨이 넘어가는 귀중한 공기는 어째서 가격이 없는가? 숲과 바다 같은 지구생태야말로 얼마나 많은 효용을 지니고 있는가? 하지만 지구생태계는 가격이 없다. 조금만 따져 봐도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대한 주관적 효용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객관적 노동량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분명하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원조인 애덤 스미스나 중시조인 데이비드 리카도나 모두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인간노동의 양이 결정한다는 노동가치설을 설파했다. 그런데 그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계승한다는 신고전파 경제학이니 근대경제학이니 하는 것은 고전파 경제학의 알맹이인 노동가치설을 폐기하고 생뚱맞게 효용가치설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출발부터 진리탐구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론>의 잉여가치설을 무력화하려는 자본주의 변호론이었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착취를 부정하는 반 진리다.

‘진리의 전당’에서는 지금도 1930년대 경제대공황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으로 극복됐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뉴딜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공황은 잠시 회복되는 듯하다가 1937년 더블딥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 자본주의가 대공황의 늪에서 빠져나온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전쟁수요 폭발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부르주아 경제학의 일부인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뉴딜정책이 세계대공황에서 인류를 구했다고 되뇐다. 현 경제위기를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나 케인스주의 경기부양책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단연코 없다. 지난 15년간 천문학적 재정지출에다 제로금리와 헬리콥터로 돈을 뿌린다는 무제한 양적완화로도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최근 문제가 되는 스태그플레이션도 마찬가지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등장했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1970년대를 휩쓴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이 1973년 석유파동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거짓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석유파동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치솟는 물가를 잡겠다며 미국 전체의 모든 가격과 임금을 동결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스태그플레이션은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스태그플레이션을 악화시킨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정부통계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면 스태그플레이션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이때에 즈음해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이윤율저하 경향 법칙이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경기를 회복한답시고 돈을 마구 풀었기 때문에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물가만 폭등했다. 이렇게 원인이 수요측 사정이 아니라 공급측 사정인 이윤율 저하에 따른 투자·생산 부진에 있었기 때문에 레이건·대처 같은 보수정권이 등장해 ‘영국병’ 운운하면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임금을 억제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후 블레어와 클린턴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모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려는 비상대책이었다. 그들은 자본의 비대위였다.

그러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2020년 경제공황은 어떻게 해서 초래됐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이 공황이 왔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자본주의 경제는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이전에 이미 공황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2019년 2분기 독일이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미국 경제도 2019년 하반기부터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그해 하반기 7월, 9월, 10월 세 차례에 걸쳐 금리를 내렸다. 회복되고 있다고 자만하며 올렸던 금리를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 그해 4분기 일본은 -1.6% 역성장했다. 이렇게 경기가 빠르게 후퇴하는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이 덮쳤다. 따라서 코로나 때문에 불황이 왔다는 ‘설’은 석유파동 때문에 스태그플레이션이 왔다는 ‘설’과 마찬가지로 덮어씌우기다. 코로나 팬데믹은 진행되던 경기후퇴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미국은 부랴부랴 5조달러를 뿌렸다.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보다 더 많은 돈을 단 1년 사이에. 그 결과 경기불황 속의 인플레이션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초래됐다.

그런데도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 스태그플레이션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사슬이 파열돼 초래됐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올해 2월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지난해 3월부터 미국의 부동산가격과 소비자물가가 급등하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생산자물가와 석유가격도 급등하고 있었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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