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열흘 전쯤, 연일 쉴 틈을 갖기 어려웠던 에어컨이 멈췄다. 인터넷 친구들과 매뉴얼 조언에 따라 전원을 차단하고 기다리길 수 시간. 수 차례의 시도에도 더운 바람을 내뿜다 오류 코드를 깜빡이는 에어컨. 어쩐지 여름날의 ‘과로’를 토로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기계도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날들을 살아간다.

주말을 지나 연락이 닿은 서비스 센터. 상담원과의 대화는 사과에서 시작해서 사과로 끝이 난다. 긴 통화 대기시간에 대한 사과, 고장으로 불편을 겪게 된 것에 대한 사과, 한 달 이후에나 가능한 방문 점검과 수리 일정에 대한 사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게는 하루 몇백 건의 전화상담을 초 단위의 업무 감시 시스템 안에서 수행하는 콜센터 노동자. 그날 그가 거듭했을 사과의 무게와 고단함에 속이 상한다.

방문점검과 수리를 신청한 이후에는 배정된 지역 서비스센터에서 몇일 간격으로 다시 사과의 문자를 보내 왔다. 무더위에 늘어난 에어컨 설치와 수리 신청으로 주변 서비스센터 인원을 모두 동원해 애를 써도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문자. 짧은 문자에도 빼곡하게 무거운 사과들이 담겨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두 달간 에어컨 설치·수리 작업 사망사고 위험경보를 발령했다. 지난 5년간 에어컨 설치·수리 작업 중 여덟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중상해 재해도 53건이나 벌어졌다. 한 달 뒤 수리 일정을 달력에서 가늠하다, 날마다 숨 쉴 틈 없는 노동 사이에 사과를 거듭해야 할 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의 하루를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까.

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조선소 1도크, 건조 중인 선박 안. 하청 노동자 유최안은 철판으로 가로 1미터, 세로 1미터, 높이 1미터, 0.3평의 공간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고 용접을 했다. 국내 조선업은 전 세계 발주량에서 4년 만에 1위를 되찾고, 호황기를 다시 마주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3년 치의 일감을 확보해 뒀지만 여전히 ‘위기’를 명분으로, 지난 5년간 삭감된 임금에 대한 원상 회복도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기본)권에 대한 보장도 회피하고 있다. 하청 노동자 유최안이 스스로를 가둔 0.3평의 철장에 붙여 놓은 피켓에는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일을 하는, 혹은 일을 멈춘 노동자들이 시민들에게, 결국 서로에게 건네는 이 무거운 사과는 누구의 몫인가.

에어컨이 멈추기 사흘 전, 기후정의동맹과 가오클이 주최하는 ‘기후정의버스 충남’ 프로그램으로 당진화력발전소에 다녀왔다. 발전사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가이드가 소개하는 ‘친환경’ 옥내저탄장 시설을 향하던 길, 석탄이 쌓여 있는 옥외저탄장 한켠에서 커다란 배관을 용접하는 노동자들을 바라봤다. 볕은 타들어 가고 에어컨을 틀어도 불쾌하고 습한 여름의 한 낮에, 여러 겹의 긴팔 옷을 입고 불꽃이 튀는 장비를 다루는 두 명의 노동자. 그들의 주변에 존재하는 유일한 그늘은 녹슨 지지대, 찌그러진 살, 찢어진 천으로 이뤄진 작고 낡은 파라솔 하나가 겨우 만드는 한 뼘의 공간이다.

폭염과 가뭄, 장마와 홍수, 경제의 위기, 노동의 절망. 이 고장난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할 이들은 벼랑 끝에 서서도 이 세계의 일상을 지탱하려 생을 갈아 넣고 있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인간보다 이윤을 앞세운 ‘싸우는 형제들’ 국가와 자본의 권력들이다.

기계도 견디기 어려운 이 고장난 세계, 타는 듯한 여름날. 무거운 사과들을 끌어안고 침잠한다. 일할 권리, 일을 멈출 권리, 일을 멈추고 다툴 권리, 일을 멈추고도 인간으로 생존할 권리를 향한 질문들 사이에 있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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