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요즘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면 김순종(70·사진)씨는 쉬 잠들지 못한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물속에 있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왼쪽 어깨뼈가 썩어 문드러졌던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의 깊은 골짜기가 그려진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 투입된 민간잠수사 25명 가운데 김순종씨가 있다. 그날 2014년 4월16일 그 배가 가라앉고 안산 단원고 아이들이 배에 남아 있다고, 같이 아이들을 찾으러 물속으로 가야 한다고 김순종씨에게 전화를 한 건 공우영 민간잠수사였다. 그때 김순종씨는 다른 민간잠수사 3명과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른) 배가 빠졌어요. 그 배를 인양하러 저를 포함한 잠수사 네 명이 갔지요. 세월호가 터지기 전이었는데 그날 따라 파도가 거세서 일을 못 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던 길 위에서 그 전화를 받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김순종씨는 차를 돌려 진도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현장에는 목포에서 온 민간잠수사 네 명이 있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투입된 건 김순종씨 일행이었다. 첫 잠수에서는 빈손으로 올라왔다.

시야는 흐렸고 배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물속에서 아이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격실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유리창을 깨야 아이들을 꺼내는데 도통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

“구명조끼가 물에 뜨잖아요. 배가 기울어서 격실 창문이 위로 향하니까 아이들이 유리창에 막혀 있더라고요. 워머 끝을 뾰족하게 해서 유리창 모서리 쪽을 내리치니까 깨졌어요. 4명의 아이들이 우리 눈앞으로 떠오르더라고요. 2명씩 안고 물 위로 올라왔죠. 그때가 4월17일이었어요.”

김순종씨는 “만약 아이들이 격실에서 나왔다면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대부분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을 리 없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루에 네 번 물때 바뀔 때마다
뛰어들었어요. 뼈가 썩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생생해요.”

맹골수도는 이름처럼 사납고 거친 바다다. 수면에서 거꾸로 처박힌 세월호 선체까지 22미터를 내려가야 했다. 유리창 깨진 곳에서 들어가 격실 곳곳을 훑으며 시신을 찾았다. 아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혹은 팔짱을 낀 채로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죽음의 순간 곁에 있는 친구를 안거나 손을 꼭 잡는 게 전부였을 아이들의 마지막을 김순종씨는 보았다.

그래서 12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압축공기를 마시는 잠수사 혈액 속에는 기포가 떠다닌다. 기포가 쌓이면 뼛속까지 들어가 뼈 조직이 괴사하는 잠수병에 걸린다. 안전규정상 잠수사는 12시간의 감압시간을 거친 뒤에야 잠수를 재개할 수 있는데 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은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물때가 6시간마다 바뀌는데 그때마다 들어갔어요. 아이들을 빨리 건져야 하니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거죠.”

2014년 7월10일 해경의 일방적 퇴거 통보로 구조현장을 떠나기 전까지 민간잠수사들은 자신의 몸에 무리가 오는 걸 느끼면서도 수색과 인양을 멈추지 않았다.

참혹한 현장에서 남은 상처
트라우마와 골괴사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나요. 사람이 죽기 직전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뭘 움켜쥐거든요. 뭔가를 꽉 잡아서 주먹이 펴지지 않는 아이들, 서로를 안고 있는 아이들 그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어떤 날은 밤을 꼬박 셀 때도 있어요. 트라우마 약을 먹으면 그나마 좀 나아요.”

김순종씨는 왼쪽 견관절도 잃었다. 무리한 잠수가 결국 무혈성 골괴사로 이어진 것이다.

“구조활동이 끝난 직후에 정부가 민간잠수사들 고생했으니까 삼천포에 있는 서울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아보라고 했어요. 몸이 좋지 않다고 느낀 12명 정도가 병원에 갔는데 나 말고도 7명이 무혈성 골괴사 진단을 받았죠. 저는 상태가 심해서 바로 수술을 했어요. 썩은 뼈를 빼내고 인공뼈를 넣었어요.”

골괴사 진단은 민간잠수사에게 ‘퇴출’이나 다름없다. 수중회사들은 ‘세월호 잠수사’ 꼬리표에 골괴사까지 얻은 그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쓰지 않았다.

그날 이후 김순종씨는 어깨뼈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잃었다. 두 달간 배 위에서 먹고 살면서 아이들을 부모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이렇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씨는 40년간 몸담았던 직업을 잃고 지금은 인력사무소를 다니며 건설 일용직으로 일한다.

세월호 참사는 세상을 바꿨다. 대통령이 바뀌고 국회도 바꿨다. 민간잠수사들의 노력이 조금은 빛을 보는 듯했다. 2020년 5월20일 ‘김관홍법’으로 불리는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피해지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의 피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던 민간잠수사도 개정법에 따라 의료·심리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골괴사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법원도 세월호 구조활동과 골괴사 발생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외면했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동료 잠수사들에게 미안하다”

김순종씨의 손을 마지막에 잡아준 건 산재보험이다.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는 6월20일 김순종씨의 왼쪽 어깨관절 무혈성 괴사에 대한 산재 요양급여신청을 승인했다.

“미안하죠. 나만 보상을 받게 됐으니까. 같이 고생한 동료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김순종씨는 8년 만에 세월호 구조활동도 아니고 산재로 인정돼 보상을 받게 된 것마저 ‘미안하다’고 했다. 하루빨리 골괴사로 생계가 어려운 동료들이 함께 보상받을 길이 열리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지내 보니까 김관홍, 그이가 이해가 가요. 자기 애들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했는지. 나도 죽지 못해 살았으니까요.”

지난 13일 오후 부산 다대동에서 만나 인터뷰를 마칠 무렵 김순종씨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김순종씨 외에도 3명의 잠수사가 골괴사로 산재신청을 한 상태다. 다른 산재신청 과정에서 1명은 골괴사가 아니라 골낭종이라는 진단이 나와 심사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민간잠수사의 눈물을 닦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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