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다큐영화 <노회찬 6411>로 바빴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올해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주간은 저마다의 의미가 남다른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연극 〈산재일기〉를 전태일기념관에서 4일부터 10일까지 일주일 동안 공연했다. 13일에는 ‘6공화국을 넘어 새로운 공화국으로’라는 제목으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20일에는 한국수사학회와 함께 ‘노회찬의 말과 글’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곧 출간될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의 강연과 대담도 두 차례 열린다. 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들어갈 수 있는 온라인추모관에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인, 얼리 어답터 노회찬’이라는 주제로 유품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노회찬재단은 4주기 추모주간의 내거는 말을 ‘노회찬의 시선, 2022’로 정했다. 내거는 말로 정했지만 따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보는 이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열어 두려 했다. 다만 이 말로 2022년이라는 시공간을 모두가 한 번쯤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나 역시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다.

그는 누구를 보고 있을까? 자연스레 구로에서 강남까지 가는 6411번 새벽 첫차를 타는 노동자로 표상되는 투명인간, 투명노동자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6411’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이 커질수록 혹시 관성화된 표현으로 굳어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투명노동자는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실체로서 존재하지만, 투명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다가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시각을 조정하면 투명인간은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다수로서의 나’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보지 않았던 존재성이다.

그래서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은 투명인간이 아니라, 그 다수를 실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투명정당이다. 깨어 있는 시민은 깨어 있지 못한 대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개념이다. 그런데 깨어 있는 시민만이 정치참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한다면, 6411 투명인간의 민주주의에서는 멀어진다. 깨어 있음이 정치적 참여 주체로서 자각에만 그친다면, 그래서 권력과 권리에서 멀어진 이 사회 다수자의 삶을 위한 성찰이 되지 않는다면 그 민주주의는 노동하는 시민들의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투명정당이 돼 버린 진보정당을 성찰적으로 비판했던 노회찬은 2022년 투명인간보다도 자신의 존재 이유에서 멀어진 투명정당을 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그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현재’는 늘 추상적이고 불투명하긴 하지만, 지금 한국 정치는 어디로 향할지 좀체 판단하기 어렵다. 특히 진보정치는 생존조차 의심받을 지경에 처해 있다. 이 불투명함은 보는 거리, 즉 시거리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자욱한 안갯길을 멀리 보이는 불빛을 보고 헤쳐 나가듯이, 혹은 눈짐작이 아니라 좌표를 보고 길을 찾듯이 시거리와 시야를 달리해야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따른 경로를 찾는 정치가 돼야 한다. 과정에서 무수한 사건들이 얽히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만들어지겠지만, 그 상황을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내는 힘은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개인이 아닌 정당이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야 한다. 같은 곳을 볼 수 있어야 길을 가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지금 과연 같은 곳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2022년 노회찬은 그 목표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 않을까.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정치적 편 가르기와 날 선 언어로 한국 정치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위대함 뒤에 나타난 이 찌질함은 정말 당혹스럽다. 극심한 양극화와 대중의 저항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파탄에 이르고, 세계 곳곳에서 대안 질서를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단일하지 않은 다양한 위험요인들이 세상의 판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도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로 볼 수도 있다. 대안을 낼 수 없는 자들이 절대 공고해질 수 없는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러나 복합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력이 앞으로의 정치 질서를 좌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공감을 넓히고 함께 풀어나가자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2022년 노회찬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겠다는 희망으로 공감과 소통의 언어로 대중을 설득하고 있지 않을까.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