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올해도 어김없이 폭염이 찾아왔다. 노동자들이 쓰러지고 있고, 고용노동부도 어김없이 폭염 대책을 내놓았다. 올해는 뭐라도 달라진 것이 있을까 싶어 살펴보다가 전에 없던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10일자 보도자료 ‘고용노동부, 폭염 대비 근로자 건강실태 특별점검’에서는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망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근로자 본인과 동료작업자의 역할도 중요하다”며 첨부된 ‘온열질환 자가진단표’를 활용해 스스로 온열질환 취약도를 선제적으로 판별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총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자가진단표의 1~7번 항목은 현재 몸 상태 및 평상시 온열질환 민감도를 확인하는 일반적인 항목이었다. 놀라운 것은 나머지 3개 문항이었다.

“8. 나는 일을 시작하게 되면 쉴 새 없이 전념하게 된다. 9. 폭염기간이라도 계획대로 반드시 외부작업 혹은 활동을 진행하려 한다. 10. 나에게 맡겨진 일을 가급적 스스로 하며, 일일이 끝까지 처리하려 한다.”

이 위화감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이 자가진단표가 자영업자용이 잘못 첨부된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정확히 ‘공사장 등 야외근로자’를 위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래의 노동해방 세상에서 만들어져 양자터널 같은 걸 통해 넘어온 것인가.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량과 작업집중도를 결정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수년간 노동계와 안전보건 전문가들이 폭염 대책의 제도적 문제와 과학적 오류를 지적했다. 그렇게 매년 개선방안을 제안하고 요구했음에도 노동부의 폭염 대책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원인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적극적인 행정의지의 부족이나 과학적 전문성 부족 이전에, 상실된 ‘현실감각’의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소의 하청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인정하라고 폭염 속에 자신을 철창에 가두어 절규하는 세상이다. 에어컨 하나 없는 거대 물류센터의 노동자들이 교섭 한 번 하자고 수십 일째 농성을 하는 세상이다. 건설노동자들은 폭염 상황에 일을 안 하면 누구도 일당을 책임져 주지 않는 세상이다. 작열하는 태양이 비추고 있는 세상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과 공간, 작업량과 작업집중도가 철저히 사업주에 의해 통제되는 ‘현실’이다.

노동부의 현실감각 상실이 드러나는 대목은 자가진단표만이 아니다. 수년째 지적되고 있는 문제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우선 기상청이 발표하는 온습도, 체감온도 및 폭염특보가 노동현장의 폭염 대응 기준으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점이다. 각각의 노동현장 특성을 고려하면 기상관측소의 온도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각 현장의 온도를 측정하고 관리해야 하며, 그 기준 역시 체감온도보다는 열사병 예방을 위해 고안된 열사병지수(WBGT)를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거대한 후라이팬처럼 달궈진 조선소 철판에 한 번만 올라서 봤다면, 급식조리실의 튀김기 앞에 잠시만 서 있어 봤다면 뉴스에 나오는 체감온도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여전한 오류는 ‘무더위시간대(오후 2~5시)’라는 개념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 누구나 아침부터 무섭게 덥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아니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나는데 지난해 5월20일부터 9월13일까지 온열질환 감시체계를 통해 집계된 온열질환자의 시간대별 발생비율을 분석해 보면 오전 6~10시가 9.7%, 오전 10시~오후 2시가 33.9%, 오후 2~6시가 40.3%로 나타난다. 절반 가까운 온열질환자가 오후 2시 이전에 발생한 것이다. 심지어 노동부 보도자료에 적시된 4건의 열사병 의심 사망사고 사례 중 2건마저도 무더위시간대가 아닌 정오 전후에 발생한 것인데 노동부 가이드는 수년째 ‘무더위시간대에 옥외작업 단축·중단’을 고민 없이 되뇌고 있다.

실효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정해서 실시간으로 현장의 열사병지수를 측정하고 그에 따른 관리를 시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례로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실시간으로 풍속을 측정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작업중지와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열사병지수 측정기의 설치와 그에 따른 휴게시간 확대를 의무화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강제력 없는 ‘가이드라인’으로는 일선 현장의 근로감독관들이 아무리 고생을 하며 특별점검을 다녀도 제대로 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전국 사업장에 대한 일제 점검·감독을 통해 열사병 예방을 위한 사업주 의무 이행을 ‘촉구’할 방침이다”는 고백처럼 말이다.

이미 여름은 와 버렸고 노동자들은 쓰러지고 있다. 법·제도적 정비를 촉구하는 이 글마저도 현실감각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될 만큼 말이다. 지금 당장 죽어 가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답은 어쩌면 간단하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보호할 권리를 확대하고 강화해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건강 이상을 느낀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을 중지할 수 있음을, 이를 방해하는 사업주는 처벌받는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알려 내야 한다. ‘1588-3088 위험상황 신고전화’를 보도자료에만 감춰 놓을 것이 아니라 열사병 예방수칙 전단지에 큼지막하게 써 놓고, 현장에 뿌려 가며 신고를 장려해야 한다. 그리고 열사병으로 인한 사망사고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해 엄중하게 처벌할 것임을 천명해야 한다. 이것이 눈앞의 재난을 마주한 감독기관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현실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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