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아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TV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원빈은 송혜교를 보면서 사랑을 돈으로 사겠다고 외쳤다.

이 대사가 떠올랐던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집회신고에 대한 경찰의 계속되는 금지통고서를 보면서 문득 원빈의 외침이 떠올랐다. ‘집회의 자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하면 될까, 얼마나 줄이면 되겠냐?’

6월 말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이달 2일에 있었던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와 관련한 수많은 집회 및 행진 신고서와 그에 대한, 또 그만큼의 ‘금지’통고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신고된 집회 등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는 약간 까다로웠는데, 그 이유는 신고할 때마다 그 내용이 계속 변경됐기 때문이다. 참가 규모가 줄고 진행 시간이 짧아지고 집회 장소가 좁아졌다. 행진 시간을 줄이고자 행진 경로를 나누기도 했다. 반복되는 금지통고의 이유가 집회로 인해 ‘교통 소통’에 심각한 불편이 발생할 것이 우려된다는 것이었기에, 집회 주최자로서 우선적으로 불편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집회 주최자로서 지키고자 하는 선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안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기 위한 이 정도의 인원, 비슷한 의견을 가진 참가자들이 그 의견을 공유하고 한 곳에 모아 공표하기 위한 이 정도의 시간, 그 시간을 위해 무대를 설치하고 이후 머물렀던 장소를 청소하기 위한 또 다른 이 정도의 시간, 그 인원을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참가자의 안전까지 확보하기 위한 이 정도의 공간, 신속하게 행진을 끝내기 위한 이 정도의 차선, 집회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 정도의 위치 같은 것들 말이다.

새로 집회신고를 했다는 말을 들은 다음날 책상 위에 올려진 금지통고서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어디까지 줄일 수 있을까. 어디까지 줄이면 법치의 영역 내에서 집회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규모와 장소를 줄이는 것이 핵심이 아닐 수 있겠다.

결국 집회신고에 대한 금지통고 사안의 핵심은 집회의 자유라는 본질을 다시 살펴보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만큼, 국가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만큼, 국민의 집단적 의사를 형성하고 표출하는 과정은 이 나라 정치구조의 핵심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헌법재판소가 말했던 것처럼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집회의 자유에 대한 본질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2조를 해석하는 지침이 된다. 12조1항은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에 대해 교통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이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아무런 맥락 없이 위 조문을 본다면 ‘교통 소통을 위한 필요성’이 있는 이상 집회의 자유는 그 중요성과는 달리 아주 쉽게 제한될 수 있다. 서울 내 주요 도로(사실 주요 도로는 여러 도로가 연결된 구간에 가깝다)가 광화문광장과 시청 일대 도심에 촘촘하게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통량이 많은 주요 도로 일부에서 일시적으로 집회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통 소통을 저해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회의 자유의 본질을 고려해 집시법 12조를 읽는다면 이는 엄격하게 해석·적용돼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집회는 필연적으로 제3자를 불편하게 할 수 있으므로 그 불편함이 수인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지 않은 이상 집회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단순히 ‘교통 소통의 필요성’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의 교통 불편이 명백하게 우려되는 정도’에 이르러야 집회를 제한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를 ‘금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원빈의 대사를 읊을 때다. 집회 참가자가 원빈에 빙의해 ‘얼마나 집회 규모를 축소하면 될까’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원빈이 되어 ‘얼마나 심각하고 명백하게 교통 불편이 구체적으로 예견되면 될까’라고 고민하며 말해야 한다.

기꺼이 경찰에 원빈 역할을 넘겨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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