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비코는 이렇게 해서 역사철학을 개척했다. 필자는 대학 1학년 시절(세계사적으로 유명한 그 1968년이다) <근대혁명사상사-핀란드 역으로>(에드먼드 윌슨 저)라는 책의 가장 앞 장에서 이 얘기를 접했다. 비코의 이 말에 자극받아 유물사관 같은 역사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 책에서 또 칼 마르크스는 인류와 인간을 해방시키는 투쟁에 일생을 바친 혁명가였으며, 혁명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자본론>을 비롯한 저술활동을 하다가 “책상 앞에서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얘기에 자극받아 마르크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사상·이론을 알아보고자 청계천 고서점을 뒤졌다. 비코·마르크스에 관한 이야기들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도, 대학 입시문제에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의 학교교육은, 대학입시는 달라졌는가? 그러면 대학교육은 어떤가? 요즘 수학의 노벨상에 해당하는 필즈상을 한국계 미국인 수학자가 받은 사실을 계기로 한국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하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수학·자연과학에만 주입식 교육이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그보다 훨씬 더 주입식이고,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무비판적으로 주입되고 있다.

이스트번 메자로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루카치의 수제자로서 대단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2007년께 그의 대표적 저서 <자본을 넘어 beyond capital>를 접했다. 이 책에서 메자로스는 ‘자본주의’와 ‘자본’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동지 엥겔스가 이것을 혼동했다고 비판했다. 현존 자본주의도 구소련도 모두 자본체제의 형태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구소련은 시장에서 자원배분이 결정되는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므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국가자본주의가 아니고, 잉여노동이 특권적으로 전유됐으므로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 통찰에 자극을 받아 메자로스에 관심을 가졌다.

그해 큰 바다 세 개를 건너 베네수엘라를 찾아갔다. 구소련이 붕괴한 이후 패배주의·회의주의·비관주의가 풍미하던 당시에 저 멀리 남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노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민중들이 떨쳐나서 혁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산동네 담벼락들에,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셔츠에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차베스 대통령의 측근인 나바로 과학기술부 장관을 그의 집무실에서 면담하면서 그도 메자로스의 <자본을 넘어서>를 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차베스 대통령이 꼭 읽으라고 추천했다는 것이다. 읽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기도 나눴다. 이처럼 세계는 넓지만 또한 좁기도 했다.

메자로스가 쓴 책 가운데 2007년에 펴낸 <역사적 시간의 도전과 책무-21세기 사회주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2017년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에서 번역했다. 이 책 또한 <자본을 넘어서>처럼 읽기가 매우 어렵다. 철학적 내용이 많은 데다 메자로스의 영어가 통상의 영어체가 아니라 그의 모국 헝가리식 영어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머리에서 이 책을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 자기 모국 헝가리의 시인 어틸러 요제프, 세계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헌정하고 있다. 이 책 1장의 제목은 “자본의 시간-지상명령의 독재”이고, 그 1절이 “개인들의 시간과 인류의 시간”, 2절이 “‘시간의 시체’로 전락한 인간”, 그 3절이 “역사적-시간 의식의 상실”, 4절이 “자유시간과 해방”이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서론이 길었다. 그의 책 1절에 있는 얘기를 몇 줄만 인용해 보겠다.

“오늘날과 미래의 어떤 개인도, 있을 법한 어떤 사회형태도 역사적 시간의 객관적 규정과 그에 상응하는 책무를 회피할 수 없다.” “극히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개인들이 속한 가장 포괄적인 사회체는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인류-특정 개인의 수명에 비할 바 없이 긴 수명을 가진-라는 점이다.” “자본체제는 단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정세적 위기들-우리 시대의 심대한 구조적 위기와 대비되는-만이 돋보이던 역사 단계에서도 극단적으로 단기적인 전망이 그것의 특징이다. 그 전망은 통상적인 재생산 주기인 수년 이상에 미치지 못하며, 요구되는 바의 신뢰할 만한 통찰을 가지고 수천년을 내다보는 데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은 코앞의 권력을 놓고 싸움박질하느라 정신이 없다. 수천년은커녕 수년도 내다보지 못한다. 여당이나 1야당이나 2030세대에게 권력의 일부를 내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어차피 수년도 가기 전에 권력의 추는 자연적으로 지금의 청년 세대로 넘어갈 텐데 말이다. 재벌과 자본은 어떤가. 저들의 머슴인 정권을 앞세워 더 마음대로 노동을 착취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더 유연화하고, 임금인상을 더 억제하고, 노동보호 장치를 더 철폐하려고 한다. 2~3년도 안 가서 공황으로 저들의 성채가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데 말이다.

노동운동은 어떤가. 자본에 포획된 노동운동은 자본을 넘어서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자본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착취철폐를 외쳐서는 안 되고 차별철폐만 외쳐야 한다.” 노동운동에 자본의 이데올로그인 후쿠야마의 “역사는 끝났다”는 궤변이 진리가 돼 있다. 자본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 반만년의 계급사회를 넘어서려는 구소련의 고작 70년의 시도가 실패한 데 불과함에도 말이다.

사회해체 위기, 지구생태 위기, 세계대전 위기 등 총체적 위기로 인류의 존망이 문제 되고 있는 이 역사적 시간에 참된 개인은 인류·인간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회피할 수 없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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