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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허 상태로 과속해 숨졌더라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법원이 중과실 사고라는 이유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서 정한 ‘범죄행위’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지난 5월 중앙선 침범 교통사고 사건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이어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교차로 직진에 좌회전 차량 충돌
공단 “운전미숙, 범죄행위 원인”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정상규 부장판사)는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A(사망 당시 55세)씨의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철근공사업체 직원 A씨는 지난해 2월 동료의 화물차를 운전해 공사현장으로 가던 중 제한속도 시속 80킬로미터인 교차로에서 직진하다 좌회전하는 차량과 충돌했다. 시속 112킬로미터로 과속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A씨는 황색 점멸신호에서 직진을, 상대방 차량은 적색 점멸신호에서 좌회전했다. 이 사고로 다발성 장기부전을 일으켜 숨졌다.

A씨 아내는 업무상 재해라며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범죄행위에 해당한다며 거절했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제한속도를 초과해 운전한 점이 화근이 됐다.

무면허에다 제한속도를 넘어 운전해 ‘중과실에 의한 사고’라는 것이다. 산재보험법(37조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부상 또는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족은 이에 불복해 같은해 9월 소송을 냈다. A씨 아내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라, 사고 원인이 무면허 상태로 인한 운전미숙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법원 “운전미숙 아냐, 상대방 과실”
교통사고 업무상 재해 범위 확대 추세

법원은 무면허·과속 운전이 산재보험법상 범죄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A씨의 운전이 교통사고처리 특례법(교통사고처리법)에서 정한 중대한 교통법규 위반행위라면서도 상대방 과실이 크다고 봤다.

재판부는 “사고가 발생하기 8개월 전 운전면허가 취소됐으므로, 망인이 사고 당시 운전 능력이 미숙한 상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사고 당시 상대방이 일시 정지 없이 좌회전했으므로 망인에게 도로교통법상 통행 우선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고 발생에 있어 일시 정지 및 양보운전 의무를 불이행하고 만연히 좌회전을 한 상대방 차량의 과실이 보다 크게 작용했다”고 판단했다. 상대방 차량이 일시 정지를 했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취지다. 재판부는 “이 같은 사정들을 감안하면, 사고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수반하는 위험이 현실화된 것으로서 업무 외적인 사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A씨가 무면허 상태였지만, 운전 경험이 많아 운전미숙이 아니었으므로 사고의 요인이 아니었다는 점이 받아들여졌다”며 “특히 상대방 차량의 일시 정지 및 양보 운전을 하지 않은 과실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업무수행 중 교통사고의 업무상 재해 인정 범위는 확대되는 경향이다. 대법원은 지난 5월 교통사고의 범죄행위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교통사고가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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