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10차 총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노동기본권에 포함하기로 결의했다. ‘일터에서 안전과 건강, 이를 위해 보장돼야 할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전 세계 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채택한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의 조성, 이를 제공할 사용자와 정부의 책무가 이제야 국제적인 기준이 된 것에 대해 그동안 너무 지체된 것일 뿐 특별하게 의미 부여할 것이 아니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또한 즉각적인 실효성을 갖는 국내법 변화도 아닌, 국제기구에서 채택한 문구의 변화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전 지구적 생산이 보편화되고 소비와 유통, 문화 콘텐츠 향유 등 세계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촘촘해지는 지금 전 세계가 ‘이윤보다 일하는 사람의 몸과 삶을’ 우선하기 위해 국제적인 기준을 세우고, 이에 적합한 노동환경을 제공하기로 결의하고 선언한 것은 적극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LO는 1919년 설립된 유엔 산하 노동 분야 전문 국제기구다. 국제기구라는 특성상 언뜻 각국 정부(우리나라의 고용노동부 같은 정부부처)를 참여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ILO는 국제기구 중 독특하게도 노사정 3부문 당사자들의 참여를 기본으로 한다. 각국 정부를 포함해 사용자 대표,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 요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ILO의 결의는 노사정의 각기 다른 이해 당사자들이 국제적으로 통용돼야 할 최소한의 기준에 대해, 어느 일방의 의견이 아닌 노사정 각 부문의 입장 차이를 조율해 공통의 합의 결과를 도출한 것이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0다.

ILO 총회에서 당연하고 마땅한 내용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사용자들과 노동계의 입장 차이는 뚜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ILO는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해 노동기본권에 ‘산업안전보건’을 즉각 포함하고자 했으나 당시에도 이견이 존재해 ‘일의 미래를 위한 100주년 선언’(100주년 선언)을 통해 “산업안전보건은 인간다운 노동의 기본”이라는 원칙을 천명하는 데 그쳤던 전례가 있다. 하지만 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건물 붕괴 참사 등 일국적 수준에서는 규제가 불가능한 원청인 초국적 기업에 대한 국제기준 마련 필요성, ILO 100주년을 맞으며 국제노총 등에서 지난 100년 동안 변화한 현실에 맞도록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가 결코 소홀히 취급될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노동안전보건’이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 중 하나로 채택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채택까지는 이견이 만만치 않았으며 이번 총회에서 사용자그룹은 최종 결의된 ‘노동환경’이라는 표현 대신 ‘노동조건’을 넣자고 주장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이 노사정 공동의 책임이라며 결의문에 관련 문구를 추가하자고 주장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사용자와 정부의 의무이자 책임의 영역이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노동자그룹의 주장이 수용되며 최종 결의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동안 ILO는 1998년 채택한 ‘노동기본권 선언’을 통해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 등 4개 분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8개 기본(핵심)협약을 포함해 왔다. 여기에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다섯 번째 분야로 포함한 것이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본협약으로 기존 155호 산업안전보건 협약, 187호 산업안전보건 증진체계 협약을 채택했다. 한국 정부는 ILO의 155호·187호 협약을 2008년 2월 이미 비준하고 있는 상황으로, 별도의 후속 절차는 필요가 없는 조건이다.

그럼에도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본협약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노동조합·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고, 증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155호·187호 협약이 관통하는 핵심은 노동 대중의 대표조직인 노동조합과 안전·보건 증진을 위한 국가정책 수립 방향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고,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촉진하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고 향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윤석열 정부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경총을 비롯한 재계 입장만을 적극 수용해 시행령 개악 의지를 밝히는 등 안전보건 문제에서 노동자 참여 보장과 일하는 사람의 권리 증진을 위한 각국 정부의 노력이 강조되는 국제적 흐름에 반하는 한국의 현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전 세계가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핵심에 노동자의 참여와 권리 보장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 시대적 흐름을 읽는 것 또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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