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어떤 기억

자료를 찾다가 몇 년 전 서울 강남의 천막농성장 근처 식당에서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온 분을 만났던 기억이 났다.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도 왔다. 학생은 인정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분은 “왜 계급투쟁이 아닌 인정투쟁인가”를 물었다. 온라인 댓글에 인정을 의미하는 ‘ㅇㅈ’이 자주 등장하던 때라 인정투쟁 얘기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그분은 지도교수의 깐깐함을 잃지 않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인정이라는 말은 흔히 쓰지만 인정투쟁 이론은 난해하다. 단순하게 불평등에 맞선 노동자에게 분배가 중요하고 무시당해 온 소수자에게 인정이 중요한 걸까. 그렇다면 노동운동과 소수자 운동은 사뭇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무시가 경제적 불평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계급운동과 소수자 운동 모두 무시와 모욕에 맞선 인정투쟁이다.

“떼인 임금 받아드립니다”라는 노조 가입 캠페인에 당혹스러웠다. 노조를 단지 임금인상을 위해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회적 투쟁 원인을 경제적 불평등에서만 찾으면 인간은 경제적 동물로 보이고 노조는 임금인상 기계가 된다. 굴욕을 참고 일하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싸웠던 경험을 떠올리면, 계급투쟁은 ‘무시’나 ‘모욕’에 대응하는 인정투쟁이다. 하지만 인정을 둘러싼 요즘 현실은 사뭇 다르다.

한평생 인정

인간은 부모에게 인정받아야 태어나고 유아기를 무사히 지낼 수 있다. 부모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성적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자격 인정이고, 좋은 대학은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자격 인정이다. 거듭된 시험을 통과하며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현대인의 ‘성장 스토리’다.

성장 스토리의 결말은 어떤 계급으로 살 것인가로 이어진다. 각종 시험을 통해 인정받으면 특권층이 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무시당한다. 이 냉혹한 사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법이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실력을 쌓아 마침내 인정받는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 스토리는 ‘부모찬스’가 작동하는 계급 세습이다. 이를 감추고 개인의 노력·실력·능력을 강조하면 능력주의가 된다.

인정받은 사람은 성장 스토리를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 ‘성장 스토리’는 ‘이생망’ 이야기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인정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인정받으면 그것을 유지하고 더 많은 인정을 위해 욕망을 키운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무시당하지 않으려 인정을 갈구한다. 이렇게 자란 인정 욕구는 권력욕과 소유욕으로 확장된다. 성인이 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가를 둘러싼 권력 경쟁을 하고, 누가 더 많이 소유하는가를 둘러싼 이익경쟁을 벌인다. 권력과 소유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성인들은 ‘성공’ 스토리에 집착한다.

황혼에도 인정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한 노인은 낙후된 요양시설에서 죽거나, 외면된 채 고독사하거나, 심하면 노인 자살에 이른다. 인정받는 노인들은 멋진 실버타운에서 즐기다가 고급 장례를 거쳐 좋은 묘지에 묻힌다. ‘성장’ 스토리에서 ‘성공’ 스토리를 거쳐 ‘황혼’ 스토리로 이어지는 일생을 보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 ‘인정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인정 방식의 충돌

물려받은 재산, 공부할 시간, 고급 과외를 받을 돈, 화려한 스펙을 쌓을 여유도 없이 무시와 모욕 속에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을 했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시민으로 인정받았을까. 단결·투쟁이다. 공돌이 딱지를 떼고 ‘귀족 노동자’ 딱지를 얻은 대기업 노조도 그랬다. 이것은 결사·집회·시위의 자유와 노동 3권을 명시한 헌법이 보장하는 사회적 인정 방식이다. 그러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려운 자들은 떼로 뭉쳐 덤비는 것을 ‘떼법’이라며 달갑지 않게 여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은 ‘떼법’을 누를 다른 인정 방법을 원한다. 떼로 덤비지 않는 개인적 노력, 거친 힘 말고 다듬어진 지식, 갑자기 ‘욱’하지 않고 오랫동안 깊이 스며들 인정 방식, 그것이 바로 시험이라는 능력주의다. 계급은 이런 인정 과정을 통해 재생산된다. ‘인정 스토리’를 가져야 기득권자의 자식도 안정적 지배 엘리트가 된다. 그래서 돈을 퍼부어 외국 유학을 보내고 고급 과외를 받게 하거나 ‘부모찬스’를 써서 스펙을 만든다.

“시험도 안 본 것들.” 공기업의 공채 정규직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며 내세운 주장은 그들에게 각인된 인정 방식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공정이고 정의다. 시험은 인정 욕구를 타오르게 한다. 합격에 매달리는 간절함만큼 인정 욕망이 자란다. 시험이 아닌 ‘경험’, ‘능력’이 아닌 ‘경력’ 등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회사에 기여해 온 비정규직을 존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인정 욕망의 그림자인 ‘무시 감정’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이다. 몇 년 전 민중을 개·돼지라고 했던 엘리트 관료의 충격적 발언은 인정 욕망과 함께 자란 무시 감정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인정 욕망은 자기 존중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부족한 점을 쉼 없이 찾아 개발해야 하는 결핍 상태를 만든다. 자기 결핍 상태에서 타인을 존중할 수 없다. 인정 욕망만큼 결핍된 그들은 타인을 끌어내린다. 무시와 차별, 심지어는 혐오로 이어진다.

엘리트의 위선과 U세대

인정투쟁은 노동을 차별하는 데만 쓰이지 않는다. 기득권 집단의 위선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인정 욕망이 가득한 지배 엘리트들은 경쟁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을 주려는 욕망도 강렬하다. 여야의 폭로로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의 ‘부모찬스’를 이용한 자녀 부정입학, 스펙조작, 논문대필, 불법상속이 드러난다. 특권층의 인정 욕망은 자신을 넘어 자녀에게 강렬하게 작동하고, 자식들의 성장 스토리는 ‘부모찬스’로 키워진 계급 세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핵심은 불법이나 탈법적 ‘세습 방법’이 아니라 계급과 불평등 ‘세습 그 자체’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선언은 헌법 조문이 아니라 늘 시민행동으로 실현돼 왔다. 자신들을 과학과 지성을 가진 능력자로 여기는 엘리트는 대중운동을 떼법, 반지성주의, 포퓰리즘으로 비하한다. 여야나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고, 정당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특정 정치인과 연계된 ‘노사모’ ‘박사모’ ‘문파’ ‘태극기부대’처럼 분노한 대중과 이를 이용하려는 엘리트의 잘못된 만남으로 포퓰리즘이 탄생한다. 대중운동은 특정 권력에 종속되지 않은 자력화된 시민의 상호작용이다.

5월9일, 한국 언론들은 구글·아마존·스타벅스·애플스토어 등에서 젊은 층이 노조설립을 주도하고 있다며 “미국 20대는 노조(Union)세대” “MZ에서 U세대로” 등의 기사를 쏟아 냈다. 노조에 호의적이지 않던 언론도 ‘노조세대’라는 용어를 썼다. 이미 한국에서는 IT산업을 비롯한 플랫폼 노동자의 노조설립들이 이어져 왔다. 정권이 바뀌는 정치적 변화나 팬데믹과 경제 상황에 따라 부침이 있겠지만, 바뀐 산업과 노동에 적합한 활동을 개발한다면 대중운동의 물결을 이룰 것이다. 노동시민의 대중운동은 사회의 보편적 권리를 지키는 힘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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