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현우 청년유니온 비상대책위원장

조선소의 도시인 거제를 배경으로 거제여자상업고의 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을 담아 낸 <땐뽀걸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영화는 전국 댄스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댄스스포츠를 연습하는 학생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영화 대부분이 함께 댄스스포츠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화해, 서로에 대한 이해와 동료가 되는 과정 같은 것들이 주된 장면을 이룬다. 최근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게 됐는데, 이유는 댄스스포츠를 하는 학생들 모습이 아니라 학교의 바깥, 가족과 거제라는 도시의 풍경 때문이었다. 거제의 기반산업인 조선업의 위축과 구조조정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가족들에게 ‘이별’과 ‘불안’을 안겨 준다. 불황으로 들어서는 도시에서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부모들이 돈을 벌기 위해 지역을 떠난다.

이 영화의 장면과 오버랩되는 두 가지 풍경을 마주했다. 하나는 정부기관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황규성 한신대 교수가 발제한 ‘군산형 일자리’ 사례였고, 다른 하나는 청년유니온 지역지부를 만나며 들었던 지역 인구 유출과 열악한 일자리 현실이었다.

군산은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한국지엠 완성차공장이 위치한 대표적 제조업 도시였다. 그러나 2017년 7월과 2018년 2월에 걸쳐 조선소와 한국지엠 공장이 문을 닫자 지역경제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2015년 3만1천명이던 광업·제조업 취업자는 주력 공장이 폐쇄된 후 1만9천700명으로 주저앉았다. 호남에서 활동했던 동료는 당시에 “군산에 가면 절대 웃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기반산업이 주저앉으면 거기에서 벌어들인 소득으로 소비했던 계층이 사라지고, 그 소비에 기반해 운영되던 도소매업과 서비스업이 주저앉는다. 말 그대로 노동소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군산형 일자리는 이렇게 주저앉은 지역의 제조업 산업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해 추진됐다. 2018년 노사민정 실무협의회 구성을 시작으로 2019년 전기차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기업들과 투자협약 체결, 노사민정 상생협약 체결, 2020년 합동 기공식을 거쳐 지난해 2월 정부의 ‘상생형 일자리’ 사업에 선정되고, 군산형 일자리 모델 첫 완성차를 생산했다. 2015년 이후 계속 하락세를 걷던 군산의 광업·제조업 취업자는 지난해 2020년 대비 1천300명 증가하며, 수년 만에 다시 반등했다.

군산형 일자리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전기차로 새로운 제조업 사업모델을 내고, 지역 내 취업자를 증가세로 돌렸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군산형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사·민·정이 협의체를 구성하고 기업을 넘어 지역민, 원·하청 노사를 아우르는 지역적 노사관계를 통해 적정임금-최대고용-최소노동시간을 목표로 지역에 상대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광주글로벌모터스(GGM)를 중심으로 있었던 ‘반값일자리’ ‘하향평준화’ 논란도 없었다. 황규성 교수에게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기존에 민주노총의 경우 완성차공장의 평균임금 폭락에 우려와 반대가 강했는데, 어떻게 군산에서는 민주노총을 포함하는 지역적 노사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너무 단순하고, 명쾌했다. “절박함” 때문이란다.

청년유니온은 최근 지역지부와 소통할 일이 많다.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예외적 상황을 기회로 사업에 치여 하지 못했던 활동과 관련한 고민들을 소통하고 있다. 비수도권 지역에서 인구유출 문제는 살갗으로 와닿는 현실이었다. 가고 싶은 일자리가 없어서, 괜찮은 일자리가 없어서, 필요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많은 청년세대가 지역을 떠나고 있다고 했다. 인구구조 변화로 지역의 대학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제조업종에서 일하던 조합원들은 무급휴직과 실직의 풍경들을 목도하고 있었다. 지역에 주저앉아 가는 제조업 일자리는 점점 더 소규모 사업장들로 채워지고, 소규모 제조업 사업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다시 청년세대를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만들거나 지역에 남아 있는 청년들을 착취하며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활동가들의 얼굴에는 지역에서 운동을 만드는 책임감과 함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운동을 만들 것이지 하는 고뇌가 깊게 스며 있었다.

고탄소배출 산업인 제조업, 에너지 산업에 대한 산업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한편으로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산업 형성과 적정 수준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중요한 사회적 과제다. 고탄소배출 산업에서 고임금-최소고용-장시간 노동으로 구성된 일자리는 이제 적정임금-최대고용-최소노동시간으로 구성되는 일자리들로 대체돼야 한다.

일부에게 돌아가는 생산의 과실을 더 많은 지역의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두고 왜 자본으로부터 더 많은 몫을 가져오기 위한 노동의 ‘전선’을 형성해야지, 같은 노동자를 ‘갈라치기’하냐는 말도 듣는다. 동의한다. 노동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몫을 자본으로부터 더욱 많이 가져와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 내부의 분배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총노동’의 이름으로 가져가는 몫이 ‘일부 노동’에 한정됨에도 이를 ‘총노동’의 몫으로 가져온 것이라 평가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어떻게 연봉 2천만원의 비정규 노동자 혹은 비임금근로자와 연봉 8천만원의 노동자가 같은 ‘노동자’인가? 불평등 타파를 외치면서, 자본에 더 많은 몫을 요구하면서 노동 내의 분배에는 인색한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계를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행보에 우려가 매우 높다. 실제로 노동유연화와 노조혐오 조장으로 점철된 보수정부 특유의 ‘개혁’이 본격화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때 노동운동이 공동의 연대전선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당장 지역에서, 열악한 일자리에서, 삭막한 취업시장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도는 구직자와 불안정 노동자들의 ‘절박함’은 절정을 넘어 무기력과 냉소로 돌아서고 있다. 만약 이들의 ‘절박함’을 담아 내지 못한다면, 더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의 동참과 지지를 끌어내는 ‘연대전선’은 요원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본에서 더 많은 몫을 가져오는 경험을 넘어, 자본에서 가져온 몫이 노동계급 내부에서 더욱 고르게 분배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사회적 연대’를 추동하는 지역일자리 혁신이 우리 사회의 ‘절박함’을 받아든 노동운동의 첫 시험대가 되지 않을까.

청년유니온 비상대책위원장 (yunion10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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