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윤석열 대통령은 1960년생이다. 20대에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다는 1980년대 중후반을, 30대에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중산층이 형성된 1990년대 초중반을 경험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골고루 잘사는 수준 등을 고려하면 이때가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 가장 태평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보통 청년 시기 경험이 평생의 세계관을 형상한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세계관은 아마도 태평천하 시대의 생각들로 구성돼 있을 것 같다.

이런 세계관은 취임사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도약과 빠른 성장”으로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얼핏 보면 타당한 이야기다. 자유는 현대 세계의 최고 가치다. 물질적 곤궁 상태에서는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어렵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풍요가 늘어야 각자도생 같은 상호 파괴적 경쟁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에 관한 낙관적 생각, 다시 말해 경제를 성장시키면 자유가 커진다는 일차원적 생각은 윤 대통령의 “나 때는 말이야” 식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간단히 말해 한국 경제는 세 가지 점에서 장기 저성장을 피할 수 없다. 첫째, 선진국 경제가 완연한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주요 7개국(G7)의 하위권 나라에 견줘도 될 만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고 인구 규모도 크다. 2020년대 한국에서 개발도상국의 성장을 상상하면 안 된다. 한국 경제는 선진국 경제와 동기화돼 있다. 현재 선진국 전반이 장기 저성장 상태다. 2% 내외 성장하면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도약과 빠른 성장”은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다.

둘째, 한국 경제가 추격 성장 이후를 준비하는 데 반복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분해해 보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자본투자와 총노동시간이 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이런 자본과 노동을 갈아 넣고 욱여 넣는 성장전략은 경제적 선진국에 올라선 이후에는 유효하지 않다. 총요소생산성이라고도 불리는 기술과 노동력의 고도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런 변화를 십수 년째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윤 대통령이 신발이 닳도록 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 수준의 개혁이 오랫동안 축적돼야 한다. 현재는 성장 재개는커녕 중진국으로의 추락이 염려되는 시점이다.

셋째, 몇 년간 스태그플레이션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R의 공포’니 ‘퍼펙트스톰’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은 경기침체를 감당하면서까지 기준 금리를 올리고 있다. 진지한 경제학자들이 짧아도 1~3년, 길면 5~10년 침체가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약적 성장은 정말로 뜬금없다. 인플레이션, 자산거품 붕괴, 세계적 공급사슬 혼란, 전쟁 등에 맞서 경제가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게 앞으로 몇 년간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취임사를 보면, 2022년 5월의 경제 사정에 대해 전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딴 세계 이야기 같다.

요컨대 저성장은 당분간 숙명이다. 이런 장기 저성장은 고도성장과 반대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한다. 자산 소유자들은 어떻게든 자산 수익률을 지키지만, 노동으로 먹고사는 서민들은 일자리 경쟁이 격해지며 임금소득이 줄어든다. 자산의 몫은 늘고, 노동의 몫은 준다. 더불어 숙련이나 단체협약으로 교섭력을 확보할 수 있는 노동자는 그럭저럭 버티지만, 비숙련·무노조 노동자는 속수무책으로 임금하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노동자 사이 격차도 커진다.

저성장과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구성원의 ‘자유’에 치명적 위협이 된다. 저소득 계층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한다. 각자도생의 경쟁이 격화하면서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공정도 늘어난다. 부패한 엘리트가 힘으로 자신의 몫을 지키려 들면, 그만큼 서민의 자유가 침해받는다. 저성장과 불평등 심화는 자유가 아니라 폭력과 지대에 친화적이다.

나는 윤 대통령이 진정한 자유, 저성장 경제에서도 유지되는 단단한 자유를 앞으로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평등을 우회하지 않는다. 사실 정통파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자유의 ‘조건’으로서 평등을 강조했다. 불평등한 어떤 이가 충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로 고전파의 대부라 할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적 자유를 다뤘는데, 여기서 사회란 평등한 개인을 전제한다. 그는 자유시장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시장경쟁의 조건인 기회의 평등을 위해 강한 상속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원칙이 되려면, 자유의 조건인 평등도 강력한 원칙이 돼야 한다.

20세기 후반의 자유주의 혁신을 대표하는 존 롤스는 ‘평등한 자유’를 제1원칙으로 삼아 차등의 원칙을 제시했다. 평등한 자유란 어떤 경제적 조건에서도 헌법적 기본권은 모두가 똑같이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평등성이 보장돼야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의 차이(능력주의)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롤스는 개인적 자유가 만드는 부와 소득의 차등은 경제적 악조건으로 인해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최하층의 여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평등한 자유라는 제1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진정한 ‘자유’란 그 조건인 ‘평등’에 눈감지 않아야 가능하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이런 점에서 약간 비겁했다. 자유를 서른 번 넘게 이야기하면서 평등은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보수쪽 정서를 고려한 의도적 배제였을 것이다. 평등은 진보, 성장은 보수라는 왜곡된 대립을 고수할 게 아니라면 이제 생각과 언어에 변화를 줄 때가 됐다. 성장으로 평등에 관련한 쟁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성장에 힘을 줄수록 윤 정부는 더 크게 실패할 것이다. 선의로 나쁜 결과를 만드는 건 이전 5년간 충분히 경험했다. 새 정부는 가치와 함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그 현실 속에 도약적 성장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으로서 평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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