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정완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회장(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교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입지 않도록 예방해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나 업무로 인해 질병이 발생할 경우 가능한 한 빠르게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몸으로 자신이 다니던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치료 및 재활비용을 지원하고, 소득손실을 보장하고, 직장복귀를 위해 직접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이다. 산재보험은 철저한 원인주의 원칙에 따라 노동자에게 발생한 사고나 질병이 해당 업무가 원인이 돼 발생했는지를 엄격히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사고는 비교적 원인규명이 쉬워 산재신청을 하고 이를 승인 받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산재사고에 비해 직업병은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는 과정이 훨씬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암이나 뇌심혈관질환 등은 산재신청부터 승인까지의 시간이 길다고 해서 급한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만, 근골격계질환은 승인될 때까지 치료를 늦추거나 소극적인 치료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승인절차가 복잡할수록, 승인까지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승인 이후의 요양기간이 길어지고, 장해가 더 많이 남고, 직장복귀가 더 어려워진다. 지난해 기준 근골격계질환의 요양신청부터 승인 여부 결정까지의 평균 기간은 113일이다. 산재신청을 하고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제 치료를 받아도 좋다는 승인을 받는 것이다. 이 기간을 단축해 빠른 치료와 재활 복귀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업주에게도, 재해를 입은 노동자에게도, 산재제도 운영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여러 방안이 제안될 수 있지만, 그중 하나로 제안된 것이 추정의 원칙(Fast-track)이다. 근골격계질환이 다수 발생하는 업종 중 근골격계 부담작업 공정과 작업방법에 사업장별 큰 차이가 없는 분야에 대해 근무기간·유효기간 등을 적용해 복잡한 전문조사 없이 신속하게 산재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해당 사업장이나 업종에 대해 여러 차례 조사가 이뤄져 있고, 해당 업종에서 특정 질병의 위험부담을 확인해 산재를 신청한 자의 대다수가 산재 인정을 받은 사례들에 대해, 또다시 반복 조사를 해서 승인까지의 기간을 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추정의 원칙은 절차의 효율화를 추구하는 제도다.

2004년에 처음으로 ‘근골격계질환 관련 업무처리지침’이 마련된 이후, 여러 연구와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고, 지난해 부산대 연구진은 그동안 진행된 직업병 인정 사례를 분석하고 선행연구 결과를 비교하고 임상의학 전문가와 협의를 거쳐 이번 고용노동부의 근골격계질환 고시 개정안을 마련했다. 2018년 1월 ‘산재신청 사업주 날인제도’가 폐지되면서 근골격계질환 산재신청은 2017년 5천127건에서 지난해 1만2천449건으로 5년 만에 2.4배 증가했다, 또한 처리기간도 2017년 84.3일에서 지난해 113일로 28일가량 늘어났다. 현행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업무관련성평가 방법인 개별 판단기준으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의 고용과 생계불안, 조기치료 지연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고시안은 2019년 7월부터 이미 근로복지공단에서 지침으로 시행하던 추정의 원칙을 그동안의 승인사례 분석을 토대로 일부 확대해 노동부 고시에 담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추정의 원칙이 적용될 경우 재해조사에서 현장조사를 생략하고 서면심사와 의학자문 결과를 토대로 재해조사서를 작성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심의 의뢰해 산재를 승인하게 하므로 기존 처리기간보다 38일 정도의 단축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추정의 원칙은 경영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정기준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의 효율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추정의 원칙과는 별개로 근골격계질환을 폭넓게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와 재활·복귀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근골격계질환에 대해 독일·프랑스·영국·미국·덴마크·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 인정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마다 재해자의 업무 수행기간·취급방법·취급중량 등을 통해 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을 평가하고 있다. 2019년 우리나라 작업관련성 근골격계질환은 9천426건 발생했는데 프랑스는 4만4천492건, 독일은 2만6천577건으로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작업관련성 근골격계질환 발생이 아직도 많이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아직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아야 할 많은 노동자들의 근골격계질환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산재 승인이 늘어난다고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이 바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근골격계질환이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현장을 개선하고, 직업병이 발생한 노동자가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요양기관은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질 개선을 이뤄 내고, 건강한 직장복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해 산재절차를 단순화·효율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추정의 원칙 확대로 적극적인 행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

경영계는 행정효율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빠른 승인절차를 통해 노동자들의 신속한 치료와 제대로 된 요양·직장복귀가 이뤄지는 것이 경영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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