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서울 퇴계로변 번듯한 건물 외벽엔 그림이 죽 걸려 있어, 나 품격 있는 호텔이요 한다. 어느 바닷가 풍경으로 보이는 그림에는 크고 작은 바위와 거기 부딪혀 포말 날리는 바닷물과 흰 구름이며 파란 하늘이 담겼다. 또 그 앞 남산자락 소나무와 인도에 서성거리던 파란 조끼 사람들이 유리창에 비쳐 그림에 섞였다. 먼 길 함께 걸어온 사람들은 목욕탕 낮은 의자에 앉아 쉬며 아직 따뜻한 쑥 빛 네모난 설기로 허기를 달랬다. 또 한 번 내일의 행진을 기약했다. 길에 나서 오래 버틴 사람들은 잊히는 게 제일 무섭다고 말한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나서 뭐라도 한다. 걷고, 기고, 굶고, 때로는 윽박지르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감염병 위기는 모두의 것이었는데, 툭툭 잘려 나가는 건 일하던 사람의 몫이었다. 목이 뎅강 잘렸다. 해고는 살인이라고 언젠가 외쳤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행진 길잡이를 했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아들 잃은 엄마가 중간에 섰다. 비행기 청소일 하다 잘려 670여일을 길에서 농성 중인 해고자가 뒷줄에 따랐다. 봄 날씨에 사람들은 땀 흘렸다. 철 따라 그 앞 남산에 곧 노란 개나리, 진달래 피어 풍경이 바뀔 예정이다. 그림 속 풍경은 달라질 게 없다. 또 그 앞 파란색 천막 농성장이 기약도 없이 풍화하는 게 함께 길 걷는 사람들 걱정이다. 여기저기,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풍경에 녹아들어 시간을 견디던 사람들이 해고 100일 떡을 나눈다. 재난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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