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의외의 선물

건강한 아기는 황금 똥을 싼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불규칙한 패턴 속에 술까지 마셔 대는 몸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온몸에 몸살 초기 증세가 나타나더니 자가진단 키트에 양성이 떴다. 인근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몸이 따갑고 코가 아픈 증세보다 나를 놀라게 한 신체 변화가 일어났다. 격리가 하루 이틀 늘어나자 스트레스와 술에서 해방된 몸은 색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황금빛 똥을 내놓았다. 코로나의 선물이다. 지구도 이랬다.

저성장기로 뭉그적거리던 자본주의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하자 경제성장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가둘 수 없는 상상력을 가진 인간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했다. 관광객으로 넘쳐나던 베니스의 바다는 다시 깨끗해지고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보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연을 뿜어 대던 거대 도시들에 스모그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등장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그럴싸한 분석도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실버 라이닝’이라는 단어도 알게 됐다. 캄캄한 먹구름에 덮인 상황에서도 그 뒤편에서 빛나는 햇살은 구름의 가장자리를 은빛 선처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실버 라이닝’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온다는 징표라고 한다. 마스크로 호흡기를 덮게 된 후에야 맑은 공기를 편하게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으며 오직 성장을 향해 달려온 인류가 이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크 라이닝

‘실버 라이닝’은 어디로 사라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더 캄캄한 ‘다크 라이닝’만 등장하고 있을까. 코로나 이후를 위한 상상력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와 비트코인 열풍에 매달리는 자본주의적 투기 욕망이 이리도 아우성일까. 환하던 촛불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상대의 꼬투리만 붙들고 늘어지는 저주와 혐오의 정치만 남게 됐을까.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 대구의 확진자를 위해 광주에서 병상을 나누던 동료 시민을 위한 정신은 어디로 사라지고 동쪽은 붉은 일색, 서쪽은 파란 일색의 균열만 남았을까.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는 어디로 사라지고 양자택일의 흑백선택만 남았을까.

세계를 휩쓴 한류의 문화 저력은 왜 좀처럼 정치적 상상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걸까.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이토록 크고 넓은 협력을 이끌어내 거대한 집단을 이룬 이유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능력 때문이라고 했다. 어차피 기득권을 공고하게 지키려는 이들에게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상력은 좀 더 체제를 잘 유지하려는 상상력 정도면 족하고 더 이상의 상상력은 오히려 죽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절실한 사람들은 과거와 같은 패턴으로는 저성장과 재난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인류가 자본주의를 발명해 내고 무한성장을 향한 무한착취와 세계적 수탈에 허덕이던 세계에 강렬한 상상력이 발휘돼 유령처럼 공산주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찬란한 상상력이 아비규환의 전쟁과 권력에 사로잡혀 뒤틀리고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곤두박질치기도 했지만, 그 상상력들에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강렬한 열망들로 가득했다. 한참 지난 21세기에 이런 과거에 기대어 대안을 꿈꾼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불과하다. 이런 진보좌파의 상상력이란 보수적 양당 사이에서 찌그러진 득표로 나타날 뿐이며 설레는 상상력은커녕 패배감 가득 안겨 줄 뿐이다.

죽어 버린 상상력

이놈의 정치체제는 현실을 입력하면 이상한 것들을 출력하는 미친 알고리즘 같다. 땀은 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노동은 보람이 아니라 빈곤으로 돌아온다. 착한 마음은 따스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선의는 악의가 돼 돌아온다. 동료 시민을 향한 사랑은 동포애로 돌아오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연대가 비수를 꽂는 경쟁으로 돌아온다. 애틋한 생명존중은 다양한 생태계로 돌아오지 않는다. 절박한 생존의 열망은 처참한 생태계 파괴로 돌아온다.

도대체 이 미친 알고리즘은 어떻게 유지될까. 시민은 악착같이 투표에 참여했다. 더 나빠질 것 같은 위기감에 저놈의 당선을 막기 위한 절박함이 우리를 투표하게 한다. 선거에 승리한 쪽을 지지한 사람들에게는 정치는 미친 알고리즘이 아니다. 그들에게 정치적 효능감을 한껏 높여 주는 승리의 축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길어야 5년을 넘지 않으며 짧으면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이런 현실에 둔감한 것은 광신적 ‘빠’들 뿐이다.

오버턴이라는 학자가 만든 창이 있다. ‘오버턴 윈도(Overton window)’라고 한단다. 그 사회가 가진 이념의 넓이와 다양성이다. 다르게 말하면 ‘담론의 창’이라고 한다. 다양성이 없으면 창은 기울어져 단순한 풍경만 볼 수 있는 편견일 뿐이다. 한국의 아이돌이 세계를 휩쓸고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국뽕에 흠뻑 취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어찌해 K-정치는 요 모양일까. 이재명 아니면 윤석열이라는 구도에 저 모든 다양성을 처박는 놀라운 집약능력일까, 아니면 남북분단, 동서갈등, 세대갈등, 진보-보수대결이라는 이항대립을 지겹게 반복하는 상상력 빈곤일까.

황금 똥의 상상력

불평등·전쟁·기후위기라는 변함없는 현실 앞에서 이를 뛰어넘을 상상을 누가 할까. 기득권을 지키려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물론 아니다. 과거의 향수를 벗어나지 못한 진보좌파들에 대한 기대도 접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걸어 볼까. 누군가는 “급진의 20대”안에 웅크린 가능성을 부단히 찾으려 한다. 각자도생의 팍팍한 삶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역동성이 있을까. 사이버 세계와 함께 자랐지만 기껏해야 N번방이나 혐오 사이트를 만든다면 그놈의 급진은 창조적 상상이 아니라 강간 범죄 개발에 불과하며 비트코인에 빠진 광기는 카지노 자본주의에 빠져 허덕이던 기성세대 답습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 상상력 빈곤은 20대 남녀의 전혀 다른 투표성향으로 나타난 세대 안의 갈등으로 반복될 뿐이다.

양자 대결의 지독한 흑백논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당제나 내각제를 위한 정치개혁에 희망을 걸까. ‘설마’하는 일말의 설렘도 없다. 정치개혁은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서 일어날 수 없다. 설혹 결과가 그런 정치개혁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내각제 개헌론을 가지고 또 거대 야당이 치고받으며 출발하는 정치판 안에서는 어떤 추진력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선이 끝난 지금도 기껏해야 청와대에서 방 빼고 국방부 건물로 갈 것인가를 따지는 상상력의 빈곤을 고스란히 겪고 있지 않은가. 다양성을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외부의 강력한 충격 혹은 거대한 전환을 일으킬 계기가 없다면 요 모양 요 꼴이다.

황금똥을 보며 상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모든 방법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기득권에 갇힌 보수와 향수에 갇힌 진보, 탐욕스런 부자와 궁핍한 계급, 과격한 젊은이와 노회한 꼰대, 당당한 ‘이대녀’와 지질한 ‘이대남’으로 나뉘고 갇힌 정체성이 아니라 그 벽들을 타고 넘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탄생한다. 인류 모두가 황금똥을 싸고, 인류의 산업활동이 쓰레기와 탄소를 내뿜는 대신에 황금똥처럼 생태계와 선순환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솟구치는 상상력을 보고 싶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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