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이다. 독재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헌장에는 개인이 없다. 민주도 자유도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한다. 군부 독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유와 민주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반감부터 생기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소감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위기를 극복하고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윤 당선자는 비슷한 이야기를 대선 출마선언문과 여러 인터뷰에서도 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가 ‘촛불’이었다면, 윤석열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인 것 같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일까. 경험적 반감은 접어 두고 냉정하게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져 보면 자유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의 표준이다. 독재의 경험 탓에 생긴 선입견을 가지고 ‘구린’ 이야기로 치부할 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정부의 목표 또는 주권자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칭한다. 자유는 개인의 정신과 육체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한 문제는 개인 사이 관계(사회)에서 발생한다. 사회적으로 정신과 육체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용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사회의 기초는 생산을 위한 분업이다. 분업은 개인의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하며 이뤄진다. 이런 에너지 소모가 바로 ‘노동’이다. 노동은 자신의 에너지(능력)를 사회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나의 육체 밖으로 지출된 노동은 최종적으로 재산으로 나에게 되돌아온다. 재산을 소유한다는 건 사회로 빠져나간 개인의 에너지를 다시 개인으로 귀속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현대적 자유는 노동할 자유며, 이는 재산을 소유할 권리로 표현된다. 참고로 노동과 소유로서의 자유는 사회주의자가 주장한 게 아니다. 자유주의 사상의 시조라 할 존 로크가 한 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민주주의’는 대중이 주권을 가지고 구성하는 정부를 뜻한다. 주권을 가진 대중을 시민 또는 국민이라 부른다. 18세기 이후부터 발전한 민주주의에서는 법을 만드는 입법부가 통치의 중심에 있었다. 군주 주권을 의회 주권으로 대체한 후에, 그 의회를 국민이 선출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에서도 주도권은 입법부에 있다. 대통령도 입법부가 만든 법을 준수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입법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입법가를 선출하는 선거가 중요해진다. 대중이 선거를 통해 어떤 의사를 표현하는지에 따라 민주주의 수준이 정해진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국민이 주권을 사용해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를 만들 때 이뤄진다. 입법부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을 만들려 할 때, 행정부가 경찰과 군대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 주권자는 입법가와 행정수반을 선거를 통해 파면할 수 있다. 정부가 지닌 막강한 힘은 국민 주권에 의해 통제받는다. 국민은 지식과 규범을 갖춘 입법가와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최선을 다해 지키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런 자유민주주의에는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다. 자유의 원천인 노동이 사라지는 실업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선택한 사람만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직 이윤을 늘리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할 뿐이다. 이윤이 없으면 노동도 없다. 경제가 침체해 이윤이 감소하면 노동을 하지 못해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증가한다. 이런 실업은 임금에도 영향을 미친다. 실업 위험이 큰 일자리일수록 임금은 낮아지기 때문이다. 실업과 임금격차는 결국 불평등한 자유를 의미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에 문제가 발생한다.

불평등한 자유는 민주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투표장에서만 평등한 국민은 민주주의에서 효능감을 느끼기 어렵다. 특히 경제침체가 장기화하면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빠진다. 토마 피케티는 장기 경제성장률이 자산(재산)수익률보다 낮아지면 부익부빈익빈이 가속하면서 세습 자본주의가 도래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수백 년의 데이터를 통해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재산 세습이 경제에서 핵심 자리를 차지하면 개인적 능력은 의미를 잃고 노동도 부차화된다. ‘갓물주’ 세계에서 노동은 궁색하다. 세습의 세계에서는 자유도 불평등하게 세습된다. 민주주의 근본 원리인 평등한 주권도 실질적 의미를 잃어버린다.

역사적으로 봐도 자유민주주의는 노동이 가지는 중요성을 무시할 때 항상 위기에 빠졌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면 대중이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가 붕괴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대중의 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21세기 미국에서는 저성장과 고실업이 일상화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됐고, 높은 실업률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부터 오성운동까지 포퓰리즘 정당이 십수 년을 집권했다.

윤석열 당선자는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포퓰리즘을 비판한다. 정권교체의 정당성도 이런 비판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는 정작 노동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보인다. 임금, 고용, 노동시간을 유연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다가 설화를 자초했다. 노동은 앞서 봤듯 자유민주주의의 코어다. 노동에 문제가 생기면 자유도 민주도 허망해진다. 노동 없는 자유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먹잇감, 심지어 독재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그가 5년 임기 동안 자유민주주의에서 어떤 성과를 얻으려면 구체적인 노동 현실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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