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지난 14일자 <매일노동뉴스> 칼럼에서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는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평가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력의 역사적 실패”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진보정당들은 정파 정치를 뛰어넘는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론가적 냉소가 과잉된 진단이다. 하지만 현실을 과감하게 ‘실패’로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실패조차 인정하지 않고 오래된 습관만 반복하려는 관성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려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가 왜 “역사적 실패”로 귀결됐는지 질문해야 한다. 십수 년이 걸리는 노정일지언정 ‘어떻게’를 물을 수 있어야 반성도 할 수 있고, 진단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더 이상 냉소 가득한 회한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깝게 이번 대선을 돌아보자. 대선 5개월 전에 이르러서야 제기된 민주노총 내 ‘민중경선 추진운동’ 과정은 오늘날 노동자 정치사업의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 현장의 정치토론과 투쟁들이 결합해야 의미있다는 생각에서 전국 순회 간담회 등이 진행됐지만, 애당초 총연맹이 나선 사업도 아니었고, 대다수 정파들의 무관심이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추진력이 미미했다.

지난해 11월 민주노조운동 내 최대 정파인 전국회의 혹은 진보당이 긍정적 신호를 보냈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다. 긴박한 일정에서 상층 간 협상이 절대시됐다. 12월에 이르러 협상 테이블이 꾸려졌는데 정의당 이외의 주체들은 조합원 전체 경선을 요구했고, 정의당은 일정상 조합원 전체 투표는 무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됐다.

표면적인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합원 투표가 아예 불가능했다고 할 순 없으나 자칫 기술적인 공백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불안정성을 무시할 순 없다는 생각이 완전히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둘째, 기층의 호응도 미미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대부분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거나 무관심한 상태에서 투표를 치르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던 정의당 역시 노동운동과의 심리적 접점을 상당히 잃어버렸고, 당원 내 동의지반도 부족했다. 일부 활동가와 당원들은 왜 사회운동과의 접점이 강화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정파적 욕심이나 패권은 부차적 문제다. 오히려 민중경선 추진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기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적이었다는 비판을 주목해야 한다. 현장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던 것에는 ① 민주노동당 분열 이후 근 10년 민주노총 내에서 ‘정치세력화’에 대한 조합원 교육이 전무했기 때문에 어느샌가 ‘정치세력화’가 매우 생소한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고, ② 진보정당들 간 해묵은 갈등과 반목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정파 간 갈등이 현장에 전이된 상황에서 일부 활동가들만의 노력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웠던 사실이 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 남 이야기하듯 말할 수 없다.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노동권 없는 노동자들, 경력단절 여성과 청년들을 포함한 여성노동자들과 성소수자, 장애인, 그리고 도시 빈민들이다. 이들은 각자 별도의 모순에 짓눌려 있지 않으며, 긴밀하게 연결된 모순들 속에서 살고 있다. 가령 주거 문제는 단지 쪽방촌의 문제가 아닌 평범한 도시민 모두의 문제이며, 그들은 불안정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오늘날 ‘정치세력화’의 의의는 이렇게 빼앗기고 착취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문제, 우리 ‘을들’의 생존이 체제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데 있다.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은 이들의 연합된 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말은 파국적 상황을 냉소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혹은 스스로를 철지난 양자택일(국민의힘이냐 더불어민주당이냐)의 함정에 함몰시키는 것이 아니다. 제3의 대안이 돼야 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왜 실패했는지, 우리가 왜 연합하지 못하고 있는지 계급관계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돌아보고 난항에 빠진 ‘세 번째 항(대안정치의 부상)’을 상상력의 견지 위에 펼쳐 놓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매우 부족하지만 고군분투하며 축적해 온 각자의 자산이 있다. 이들이 무엇을 선언하건 각자의 힘만으로 사회운동 전반을 혁신할 수는 없다. 무리하게 통합하려 해서도 안 된다. 연합을 구축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개방하고 양보하고 또 연대하면서 공동의 발전을 이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공멸뿐이다.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는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에만 집착하다가 본질을 놓쳤다. 그것을 현재적으로 재가동시키려면 오늘의 조건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난 10년 민주노총은 수십만 명의 ‘노동권 없는 노동자들’을 조직해 왔다. 한국 사회 어느 주체도 그런 일을 해내진 못했다. 자명하게도 앞으로 민주노총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멈춰 왔던 ‘정치세력화’라는 쟁점에 대한 논의를 가동하고, 조합원 교육 커리큘럼도 다시 써야 한다.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론 아무것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상층과 기층에서 이런 노력을 선행해야 전체의 동의지반도 만들 수 있다. 이런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5년 후 우린 훨씬 나쁜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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