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니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자연유산을 할 확률이 3.5~7% 높다는 연구 결과는 생식과 노동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무월경이나 생리불순, 월경통 같은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의 생식계통 질환을 일반적으로 노동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연구용역을 받아 2018년 우송대 산학협력단이 수행한 ‘자녀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생식독성 물질에 노출된 가임기 여성은 최소 10만7천명에 이르고 이들이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할 확률은 일반 가임기 여성보다 33%가 높다.

유해한 화학물질이 생식기능에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사례는 1995년 LG전자 양산공장 사건이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집단 무월경 증상으로 문제가 됐다. 조사 결과 전자부품의 미세한 먼지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쓰는 세척제인 솔벤트5200에 포함된 브로모프로판 때문이었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보호구도 착용 없이 생식독성 물질에 노출되면서 여성노동자 17명은 월경 이상과 불임, 남성 6명은 정자 감소증을 보였다.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교대근무나 불규칙한 야간노동, 장시간 노동도 생식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2019년 이준희 순천향대 서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와 이완형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국민건강영양조사(2010~2012년)에 참여한 여성노동자 4천78명의 유산 경험을 조사했다. 주당 50시간 미만 일한 여성보다 주 61~70시간 일한 여성의 자연유산 위험이 66%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당 70시간 이상 일할 경우 자연유산 위험은 56%까지 치솟는다.

근로기준법은 임신 노동자에게 방사선 취급업무, 강력한 소음작업, 이상기압, 유기화합물 4종(벤젠, 2-브로모프로판, 아닐린, 페놀) 등의 업무를 금지하고 있지만 생식독성 물질 취급에 대한 규제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임신중단 합법화를 계기로 여성의 생식 건강권을 모성보호 차원을 넘어 건강한 재생산 권리 개념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재생산 건강은 “생식기나 재생산 기능 발달 과정이 단지 질병 차원이 아니라 신체·정신·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컨대 생식기나 재생산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보장받을 권리나 존엄성을 가지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월경할 권리,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합리적인 피임도구의 접근, 안전한 임신중절수술과 임신중단에 필요한 의료서비스의 보장이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재생산 건강권은 모든 노동자가 성·재생산 건강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차원으로, 다른 건강권과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셰어에서 공개한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에는 노동부 장관에게 건강한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노동환경 실태조사 실시 의무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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