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사태는 우리를 넘었다

현실은 정규와 비정규로 단순하게 구분하는 이중노동시장을 넘어섰다. 특수고용직, 종속적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를 비롯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늘어나면서 ‘다중 노동시장’ 혹은 ‘분절적 노동시장’이 됐다. 그동안 비정규직 정규직화 이슈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노동기본권 밖에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조건들에 따라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로 진입장벽이 높으면 정규직화 요구가 낮다. 공시라는 높은 벽이 있는 공공부문이 그렇다. 시험이라는 장벽을 무시하면 반발이 일어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공채 정규직의 사례가 보여준다. 둘째로 산업적·계절적 유동성이 높으면 정규직화 요구가 낮다. 일이 줄면 사람도 줄고 일이 많으면 사람이 늘어나는 유동성에 맞춰 여기에서 일하다 저쪽으로 옮기는 유연성이 높으면 정규직 되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건설업이나 조선산업 상당수 비정규직이 그렇다. 셋째로 독립성이 높으면 정규직화 요구가 낮다. 정규직과 같이 일하지 않고 독립된 기업의 노동이 그렇다. 넷째로 정규직과 같이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차별을 강하게 느낀다. 대비가 강하면 정규직화 요구가 높지만 대비가 약하면 정규직화 열망이 약하다.

이런 상황 판단 없이 정규직화 소송해서 몇천 만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무차별적으로 퍼뜨리며 “니들은 소송했다가 취하해도 수억원을 받을 수 있으니 무조건 소송하라”라는 부채질에 뜨악하다. 이게 계급운동인가, 로또 광고인가. 계층상승 운동에도 못 미치는 이기심 부채질이 아니면 뭔가.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는 포퓰리즘이다. 엘리트주의와 대비해 포퓰리즘(인민주의 혹은 대중주의)으로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포퓰리즘은 세상을 바꾸려는 ‘대중운동’과 달리 인기를 끌기 위한 무책임한 선동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니 부끄러움이 없다.

경로는 다양하다

진입장벽·유동성·독립성·대비에 따라 달라지는 정규직 되기 열망을 무시하고 천편일률적 정규직화를 추구하는 것은 계급적 단결이 아니라 계층상승 경쟁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정규직화에 성공해도 노동운동은 실패하거나, 노동자끼리 갈등으로 분열하거나, 공감도 조직력도 약해 극단적 상태에 빠진다.

늘 비교당하며 차별에 시달리지만 정규직 진입장벽이 낮은 곳에서는 정규직 되기를 추구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곳에서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공공부문에서 만든 교육공무직이 그렇다. 잘하는 스포츠 선수는 혼자 드리블하지 않고 패스를 통해 돌파한다. 진입장벽이 높고 정규-비정규 갈등이 심한 곳에서는 우회가 필요하다. 불가피하게 직접고용 계약직이나 자회사를 선택한 사례가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비교 강도가 낮은 곳에서는 그에 맞는 독자적 경로가 필요하다. 이렇듯 비정규 노동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경로를 풍부하게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다층적 노동시장은 정규직화 문제를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 되기가 노동계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착각하면 노동권 사각지대의 노동자들과 연대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특수고용직, 종속적 자영업자, 수많은 플랫폼 노동자는 정규직화를 별로 외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원청이 우리 사장이라는 ‘원청 사용자성’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것을 부인당하기 때문에 ‘노동자성 인정’이 먼저다. 비정규직 문제를 “부모를 부모로 부르지 못하는 서자”로 비유하지만, 노동자임을 부인당하고 노동권도 누릴 수 없는 노동자들은 서자냐 적자냐 이전에 “나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인정을 갈망한다.

원칙이 반칙이 될 때

많이 받는 사람이 나눠서 격차를 줄이는 연대임금을 주장했을 때, 원칙론자들은 대기업 노조에게 양보를 강요한다고 씹었다. 세월이 지나니 결국 그들의 원칙은 고임금 노동자의 이기심을 지지한 결과가 됐다. 한참 지나 상층은 덜 올리고 밑은 많이 올리자는 '상박하후'도 나왔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뻥카’였다. 연대임금은 일정 기금을 어려운 이웃에게 지원하는 사회공헌기금으로 변했다. 반대했던 곳에서도 나중에 이런 기금을 만들었다.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자본가와 함께 살려는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왜곡을 하던 비타협론자들로부터 시쳇말로 ‘뒈지게’ 욕먹었다. 같이 투쟁을 만들었으나 곁에 선 사람을 타협밖에 모르는 자로 몰아가던 그들에게 상황을 타개할 교섭을 만들 용기가 있었을까. 상황이 비타협적으로 무르익을수록 현장은 갈라져 다수가 노조를 탈퇴하고 극단적 선택이 이어졌다. 그들은 아직도 용감한 선택으로 기억하겠지만 비타협 원칙은 처절하고 치명적인 반칙을 낳았다.

조합원은 한계에 다다르고 사용자는 오래된 관성 덩어리에 갇혀 있는 조건에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할 때, 일반적 상황에서나 실현 가능한 편리한 접근방법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은밀하게 사용자를 접촉하려 시도한 것은 그들이었다. 다양한 과정이 동반되는 교섭을 그토록 부인하던 원칙론자의 몇 번의 변칙을 알게 된 후 쓰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을 완화하는 방안을 찾으려 할 때, 그들은 비정규직 당장 철폐를 들이댔다. 그렇게 주장하며 10년 넘게 걸려 정규직 된 사람들에게 위대한 계급 전사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현실은 대부분이 기득권자가 돼 차별도 노조도 나 몰라라 했다. 올챙이 시절 잊은 개구리가 떠올랐다. 개구리는 그나마 올챙이를 낳아 다시 개구리를 만든다.

획일화된 무능

원칙은 중요하고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지켜 내야 한다.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면 원칙은 반칙이 된다. 중층적으로 분절된 노동 현실은 획일적 방식으로 풀 수 없다. 분절된 노동 현실에 맞는 다양한 해법을 발견해야 한다. 현실의 다양성을 담아 내지 못하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당장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총파업 구호로 걸고 핏대를 세우면 골 때리는 짓이 될 수 있다.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고 획일적 기준으로 대응하면 실패는 불 보듯 빤하다.

무능을 로또로 감출 수 없다. 다양한 노동 특성을 파악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끌어내지 못한 채 손쉽게 선동하는 방법이 바로 “너도 수억원 받을 수 있어”라는 식의 부채질이다. 꽤 봤다. 이런 식의 정치를 나쁜 의미로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촛불의 희망을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좌절에 빠지게 하더니 부동산·주식·가상화폐와 결합된 돈벌이 욕망으로 변질시켜 버린 것은 가장 큰 정치적 실패다. 희망을 욕망으로 바꿔 버린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사탕발림으로 시민을 유혹해 표를 얻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이걸 노골적으로 하는 것이 허경영이다.) 안티 페미니즘으로 혐오를 부풀리고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심을 부풀려 ‘이대남’을 만드는 정치도 심각한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정치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혹하는 미끼를 던져 투쟁으로 유혹해 개고생을 잔뜩 시키는 결말, 계급적 원칙인 것처럼 떠들지만 기득권이 되려는 계층상승 경쟁, 세상을 바꾸자고 핏대 올리면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노동의 특징을 잘 살려 낸 대중운동이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다. 노조가 세상을 바꾸는 계급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을 이익 종자로 만드는 로또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살피자.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