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1. 지난달 4일은 고 이재학 PD의 두 번째 기일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청주방송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했고, 청주 목련공원에서 이재학 PD와 인사를 나눴다. 여전히 고인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가족·친구·동료들이 많았고, 모두가 이재학 PD와 함께한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2. 그가 처음 청주방송에서 비정규직 동료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면서 해고됐을 때, 그 이후 어렵게 용기를 갖고 방송 비정규직 문제해결의 선례를 남기기 위해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우리는 그의 뜻을 다 알진 못했다. 그가 1심 패소 판결문을 받아든 채 혼란과 불멸의 밤을 보내며 끝내 좌절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간의 그의 심정과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깨달았다. 너무나 늦은 시점에.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이재학 PD 사망 이후 그의 죽음의 본질과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및 해결방안에 대한 진상조사가 진행됐고, 방송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법원은 이재학 PD가 노동자라는 점과 부당해고된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면서 타락한 1심 판결을 바로잡았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방송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질타했다. 고용노동부는 청주방송에 대한 근로감독·실태조사를 통해 ‘무늬만 프리랜서’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을 최초로 밝히면서 노동자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MBC와 KBS에서 근무한 구성작가의 노동자성이 노동위원회에서 최초로 인정됐고, 청주방송과 대전MBC에서 근무하는 MD의 불법파견 문제가 법원과 노동청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의 노동자성 인정을 위한 고발투쟁도 진행되고 있다. 또 얼마 전에는 KBS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서울고법 판결, YTN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 편성PD 등 12명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법원 판결 등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노동부가 처음으로 공중파 3사(MBC·KBS·SBS) 프리랜서 작가들(보도, 시사·교양)의 근로자성 여부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조사 대상 363명 중 152명이 노동자로 인정된다고 판단하면서 각 방송사에 근로계약 체결을 포함한 시정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는 방송 비정규직 문제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노동문제에서도 방송 비정규직 문제는 그리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한빛 PD 투쟁’과 ‘이재학 PD 투쟁’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 관심과 많은 이들의 노력,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 등이 차곡차곡 쌓여 변화를 추동했다. 이런 점에서 이재학 PD의 삶과 죽음은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면서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3. 그러나 방송 비정규직 문제는 여전하다. 거대 권력인 방송사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중심의 방송 비정규직 고용형태, 차별, 불법파견, 다단계 하도급 구조,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노동법의 사각지대 등. 본질은 방송사가 비정규직의 불안과 차별을 자양분 삼아 이윤 창출과 권력 강화에 여념이 없는 후진적인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사의 이런 행태는 앞으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노동부를 포함한 관계부처도 한몫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방송작가 근로감독 결과에 따른 노동부의 시정요구에 방송사들은 노동자로 인정된 2년 이상 근무 작가들을 작가가 아닌 방송지원직군으로 전환해 고용한다는 입장이다. 2년 미만 작가들은 총 근무기간 2년까지만 근무하는 방향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한다. ‘작가’를 노동자로 고용하지 않고 여전히 ‘프리랜서’로 존치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둔다는 점에서 노동부의 시정요구를 우롱하는 처사다. 그럼에도 노동부는 수수방관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문제해결 의지가 없기는 노동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4. 방송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해 노동법상 ‘근로자’ 개념 확대, 적정임금제 도입, 차별구제절차 실질화, 표준계약서 현실화, 방송사 재허가 조건상 고용 건전성 기준 강화 등 법·제도적 개선방안도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 방송 비정규직 문제의 변화는 ‘우리들’이 추동해 냈다는 점에서 결국 남은 과제의 해결 주체도 ‘우리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단결과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재학 PD 투쟁’은 방송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우리들’의 투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던져 줬다. 각자가 처한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함께 기울이면서 연대의 경험을 축적해 간다면 상호 간 신뢰와 연대, 단결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이재학 PD 투쟁’은 그 가능성의 단초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부족한 점은 부족한 대로 평가로 남기되 잘 싸운 점은 우리의 성과로 미래를 위해 가져가면 좋겠다.

노동조합이 언제나 올바르고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방송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있어 노동조합은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들’이 노동조합으로 하나가 돼 함께할 때, 단지 구호로 그치지 않고 방송사들이 그 ‘하나가 된 함께’를 진정으로 두렵게 바라볼 때 방송 비정규직 문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변화가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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