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하다 직장내 괴롭힘과 과로에 시달리다 숨진 고 이찬희씨의 남양연구소 동료들이 24일 오후 연구소 공원에서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 제공>

“찬희야 미안해.” “괴롭힘과 부당한 노동에서 해방되시길.”

24일 오후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하늘로 동료들의 애도 글이 적힌 80여개의 풍선이 올라갔다. 남양연구소 디자이너로 일하다 직장내 괴롭힘과 과로를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찬희씨의 동료들이 마련한 추모행사였다. 날씨는 포근했고 하늘은 맑았다. 연에 묶여 있던 풍선은 약 3분간 하늘을 날다가 다시 동료들의 품에 안겼다.

현대차 사무·연구직 집단행동은 처음
동료들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남양연구소 직원들은 이날 오후 12시 연구소 본관 앞 공원에서 ‘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주제로 추모 집회를 진행했다. 지난 17일 저녁에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현대차에서 생산직이 아닌 일반 사무·연구직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연구소 직원들은 점심시간에 맞춰 속속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회 시작 30분 전부터 4~5명이 모여 풍선을 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각 근무지에서 동료들이 모였다. 이들은 풍선에 “지금부터 함께하겠습니다. 편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뒤늦게 찾아봬 죄송합니다. 이제는 편하게 쉬세요” “이찬희 책임연구원, 하늘나라에서 웃으면서 살아가세요” 같은 문구를 풍선에 적었다.

동료들의 글씨가 적힌 하얀 풍선은 한데 묶여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행사를 준비한 동료 A씨는 “직원들이 퇴근하는 저녁시간보다는 점심시간에 많은 직원이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대를 바꿨다”며 “지난 촛불집회가 유족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 만큼 이번에도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바뀌지 않는 조직문화의 변화를 바랐다. 지난 촛불집회에 이어 참석했다는 B씨는 “회사는 시스템을 이야기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이라며 “외부 인사를 들여 컨설팅한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쉽지가 않다. 이런 고민을 같이 해 보자는 취지에서 모인 것”이라고 전했다. 바쁜 업무와 실적 압박이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 고 이찬희씨의 남양연구소 동료가 풍선에 “찬희야 미안해”라는 문구를 적었다.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 제공>
▲ 고 이찬희씨의 남양연구소 동료가 풍선에 “찬희야 미안해”라는 문구를 적었다.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 제공>

뒤늦게 사과한 사장에 “변화 없을 것”

박정국 현대차 연구개발본부장(사장)이 21일 연구개발본부 임직원에 이메일을 보내 사과의 뜻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직원들의 불신은 컸다. 박 사장은 이메일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제3의 외부 기관을 통해 비상식적인 업무 관행을 포함한 조직문화 실태 전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하고, 신속하고 투명하게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직원 C씨는 “디자인센터장은 이찬희 책임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며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자 1년4개월이 지나서야 담화문을 냈다. 그마저도 직접 유족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하거나 전화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직원 D씨는 “박정국 사장이 외부 기관을 통해 향후 조사한다고 하고 한참 동안 시간을 끌 것이 뻔하다”며 “고인에 대한 추모는 마음을 모아 진행했지만, 변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우려했다.

풍선이 모여 80여개로 늘어나자 직원들은 공원 가운데 둥글게 모여 묵념했다. 한 참가자가 “이찬희 책임연구원을 추모하며 풍선을 천천히 올려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연에 묶은 풍선이 하늘로 떠올랐다. 3분여간 풍선이 하늘을 날다 내려오자 직원들은 각각 흩어졌다. 동료들은 이날 집회 사진을 모아 사진첩으로 제작하고 이틀 뒤에도 같은 장소에서 추모집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찬희씨는 조울증·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6개월간 휴직하다 지난해 9월 세상을 등졌다. 이씨는 디자인센터 임원 A씨로부터 “누구야 무슨 냄새야” “디자인 못 하면 지하실 갈 줄 알아” 등의 말을 들었고, 수시로 밤샘근무를 했다. 유족은 지난해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해 다음달께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고 이찬희씨의 남양연구소 동료들이 풍선에 적은 문구.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 제공>
▲ 고 이찬희씨의 남양연구소 동료들이 풍선에 적은 문구.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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