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첫눈이 왔는데, 제법 큰 눈이었다. 모든 준비를 순식간에 마친 동네 꼬마 녀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신나서 뛰는 동네 아이들과 미끄러질까 걱정돼 따라붙은 엄마 목소리로 일대가 시끌벅적했다. 통 쓸모를 찾지 못하고 베란다 창고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플라스틱 눈썰매가 활약할 시간이다. 산등성이 주택가 골목길엔 내리막도 많아 주욱 미끄러지는 재미가 크다. 아이들 속도 모르고 썰매 뺏어 타고 자기가 신난 아빠 뒤를 아이들이 울며 따라갔다. 오리, 펭귄 모양 눈 집게도 인기였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눈싸움이다. 뽀드득 잘 뭉치는 눈덩이가 여기저기 휙휙 날아가 퍽퍽 꽂혔다. 짓궂은 오빠는 기어코 동생 목덜미에 눈 뭉치를 욱여넣었고, 울음 터진 동생이 엄마를 찾았다. 곧 더 큰 눈 뭉치 들고 오빠를 쫓다가 그만 미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진작에 드러누운 아이들은 팔다리를 휘휘 저어 눈밭에 모양을 새긴다. 천사란다. 눈사람 만들겠다고 눈 굴리던 아이들은 겨우 축구공 크기 정도를 만들다가 스스로 눈사람이 돼 갔다. 추운 줄도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 보느라, 아빠들은 집 앞 눈 치울 줄도 모르고 가만 서서 눈사람이 돼 갔다. 설설 기던 차 한 대가 곧 방향을 잃고 주욱 미끄러지다 길을 막고 멈췄다. 119 소방대가 출동해 굵은 소금을 온 데 뿌렸고, 눈이 다 녹았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서운했다. 온전한 눈을 찾아 좁은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배달 오토바이가 그 길을 발발 기어 겨우 지났고, 주말 물량을 터느라 분주했던 택배 트럭이 멀찍이 아래에서 멈췄다. 눈길 지켜보며 한숨 쉬던 택배노동자가 뒤뚱뒤뚱 걸어 물건을 날랐다. 다 젖은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감기 걱정하던 엄마는 달콤한 핫초코 어떠냐며 꼬셨다. 그 밤 아이들은 지쳐 꿀잠에 들었고, 이십대 청년들이 나타나 눈덩이 굴려 사람 키 높이 눈사람과 이글루를 만들었다. 그거 다 곧 녹아 없어질 것인데, 큰 노력을 들였다. 지나는 사람들에 적잖은 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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