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애인의 노동은 평가절하되는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장애인노동권담론모임이 3년간의 연구와 조사를 이어 가고 있다. 올해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연구와 조사를 했다. 장애인노동권을 고민하는 담론모임 활동가들은 생산성 중심 평가의 한계를 넘어 담론을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들의 주장을 5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2012년에 이어 한국 두 번째 장애인 판사 임용.’

얼마 전 모 예능프로그램에 시작장애인 판사 김동현씨가 출연해 화제가 됐다. 고위 전문직업인 판사가 사회적 소수자인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화제가 된 걸까.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판사가 되려면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돼서일까.

생각해 보면 신선한 충격을 줄 만한 일이다. ‘장애인’이란 정체성만으로 동정과 시혜,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풀풀 풍기는 ‘판사’라니 어색하다고 느끼기 쉽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이 공부하고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점자책이나 음성지원서비스가 부족한 현실에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래도 판례 등은 중요한 공적 서비스로 취급하니 점자책이나 음성지원서비스가 다른 민간영역보다는 장애인 친화적이었으려나 하고 생각해 본다.

장애인 판사와 장애인 노동자

장애인을 판사나 변호사·의사 등과 같이 전문성을 가진 직종에서만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교사·사회복지사·컴퓨터 프로그래머·조립공·수납원·상담사 등 다양한 직종에서도 장애인은 드물다. 전문직종이니 전문성을 검증할 시험 등이 어렵고 인원도 소수만 필요한 직업군이 아닌데도 보기 힘들다.

왜일까? ‘장애인’을 무능력한 존재이거나 복지의 대상이지 노동하는 주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장애인 노동자’는 형용모순처럼 여기게 만드는 편견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도와 관행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듯 행해진다.

장애인은 ‘복지에 대한 권리는 인정한 시민’일 수 있어도 ‘노동권이 있는 시민’으로 대우받지는 않는다. 장애인이 노동자일 수는 없게 만드는 각종 법과 제도들이 떡하니 뒷받침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 보장법(기초생활보장법)이나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장애인고용법), 최저임금법이 얽혀 장애인 노동자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장애인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최저임금을 받으면 안 되거나(기초생활보장법 6조의3), 장애인을 고용하는 보호작업장 등에서는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되거나(최저임금법 7조), 보호작업장에서 훈련생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일을 해도 임금을 절반만 줘도 된다(장애인고용법).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평가절하된다.

그 결과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2020년 기준 37만원이며, 매년 9천여명 수준이다. 2020년 직업재활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2019년 시급은 3천56원(2020년 민주노총 실태조사)로 당시 최저임금(8천350원)의 36.6% 수준이다. 한 달에 30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전체 중증장애인 노동자 중 30%에 달한다(2021년 국감자료). 이 모든 통계가 장애인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성원권)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아예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는 현실은 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월 20만원도 못 받지만 일하고 싶다는 장애인 노동자의 속내

얼마 전 만난 장애인도 보호작업장에서 월 20만원 미만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하루 8시간을 일한 대가라니 기가 차다. 누군가는 고작 10만원 벌려고 그렇게 일하냐고, 어렵게 산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그에게 필자는 만약 장애인에게 먹고살 만큼 돈을 준다고 해도 일하실 거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친구들도 만나고 뭔가 만들면 즐겁다고 했다.

그렇다. 노동은 단지 소득확보 수단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그렇겠지만 특히 장애인에게는 더 그렇다. 생활세계에서 추방된 장애인들이 일터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기회’를 얻고 노동과정에서 일의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의 노동 참여는 실질적인 시민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문제는 임금은 적어도 차악인 선택지만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전에 르포를 쓰느라 만났던 소아마비 장애인의 이야기는 이를 더 확실하게 말해 줬다.

“일은 존재예요. 나 여기 있어요, 하는 거죠. (일을 안 하면 장애인을) 안 돌아보죠. 내가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보지 않았던 것처럼요.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과) 섞여서 일하지 않으면 그때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손으로 하는 건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일을 중단한 적이 없다는 그는 일터에서 겪는 장애인차별에도 자신의 노동은 장애인이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애인 노동자의 출현이 가져올 노동의 미래

그렇다면 장애인의 노동 참여, 즉 장애인 노동자 인정은 장애인의 삶만 변화시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장애인들의 삶과 일터에도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먼저 장애인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노동과정은 상호인정의 과정이 된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생산물을 접하면서 ‘다름과 공존의 사회적 가치’를 만든다. 이렇듯 장애인의 노동은 개별 노동자가 생산하는 사용가치(생산물)나 이윤(잉여가치)을 얼마나 생산했느냐에 주목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셋째 장애인의 신체와 비장애인의 신체가 만남으로써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다른 느낌을 형성한다. 정상으로 여겼던 신체와 정신의 획일성을 깨는 다양한 정동을 창조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른 방식으로 협업하면서 깊어진 노동과 인간관에 대한 변화는 ‘관계적 노동’에 주목하게 만든다. 개별 기계에 부착된 개별노동자가 얼마나 생산했냐를 평가하던 노동(능력)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애인의 신체가 노동현장, 일터에 들어옴으로써 노동공간의 모습은 달라진다. 비장애인 중심의 일상 풍경(공간)도 변형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체제는 공장을 돌리기에 적합한 신체와 지능을 가진 사람들만을 ‘노동자화’한, 철저하게 비장애인 중심 사회로 만들었다. 공장에 부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 장애인들을 배제했다. 장애인을 노동하지 않는 인간, 전체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노동하지 않는 존재’이거나 ‘노동 능력 없음’ ‘노동의 질이 떨어지는 존재’라는 편견과 배제를 강화했다. 자본주의적 공간에 진입할 수 없는 몸들을 가두는 ‘(장애인)시설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노동의 영역에서 추방돼 삶의 영역에서 쫓겨난 장애인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함으로써 다시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올 틈을 넓히며 사회의 작업공간과 삶터를 바꿀 것이다.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작업실 통로는 넓어질 것이고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도록 점자블록과 진동벨이 만들어질 것이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표준화된 작업공간은 바뀔 수밖에 없다. 모든 노동자는 다른 존재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저상버스, 엘리베이터, 계단식 건물구조의 변화 등등 삶의 세계 변화가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일터의 변화가 삶터의 변화를 이끌 것이다. 비장애인을 표준으로 상정했던 공간의 변화가 다시 노동과 인간에 대한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풍경이 바뀌면 생각도 상상력도 바뀌는 게 이치 아닌가.

나는 감히 아니, 당당히 주장한다. 장애인노동권 보장은 기존의 노동개념에 균열을 낼 것이라고. 탐욕적인 이윤 중심의 노동을 깨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장애인노동권 보장은 단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간에 인간적인 노동에 대해 사유하고 다른 사회질서를 원한다면, 함께 장애인노동권에 힘을 보태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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