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일환경건강센터장)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20대 국회에서 제헌국회 이래로 가장 많은 2만4천141건의 법안이 제출됐고 3천195건이 가결됐다. 20대 국회에서 의원발의안 1만건이 발의되기까지 20개월이 걸렸는데 21대 국회에서는 13개월 만에 이뤄졌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이해와 가치가 충돌하는 온갖 문제의 해결책을 ‘입법’에서 찾는 듯하다. 입법은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유효한 방식이다. 많은 갈등이 입법을 기점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법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안전·보건 분야도 마찬가지다. 여러 관련 법들이 존재했지만 현장실습생 홍정운군은 죽음에 이르렀다. 현장실습생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거나 이제야 드러나는 위험으로 병들고 다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제조항을 추가하거나 업종·직종 맞춤형 특별법을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오래 전부터 비판이 있었던 미비한 산업안전보건법의 문제(예방관리 차원의 효과성도 문제였지만 특히 규제순응을 위한 처벌대상과 수준의 문제)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지만 시행되기도 전에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성숙한 사회는 법의 취지를 따르고 미성숙한 사회는 법의 조문만을 좇을 것이다. 야만적 사회는 법의 취지는커녕 조문조차 지키지 않는 부류들이 지배한다. 성실한 입법자는 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조문을 갈고 다듬지만, 타락한 입법자는 그럴싸한 법취지를 내세우지만 조문을 통해 빈틈을 만든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새로운 일터 안전·보건법이 필요하다. 일터의 위험을 다루고 관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윤추구 방식에 대한 가치적 개입이 요구된다. 이것을 강제하는 것은 새로운 법률로서만 가능하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지난 수십년간 존재해 왔지만 그 효용성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부실한 산재통계 지표만으로도 입증된다. 고용노동부 일부 부서와 안전보건공단을 중심으로 한 행정기구의 효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국 사회가 이미 50년 전에 성찰을 시작하고 완전히 새로운 법과 기구를 만들게 했던 주제가 여전히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시의성을 가진다. 물론 우리 사회도 20년 전부터 주장해 왔지만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보다 기업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할 만한 사회적 동력이 미처 축적되지 못해 유예돼 온 주제였다. 유예된 기간 동안 매년 산재승인 통계로만 천명 내외의 노동자들이 재래형 재해로 사망해 왔다.

이제 일터의 위험을 다루는 사회적 방식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할 수 있겠으나 새로운 법 제정과 그에 기반한 안전보건 행정 시스템·거버넌스 구축이 기본이 돼야 할 것이다. 이는 고작 몇 명의 전문가와 입법 보좌관들의 손을 거쳐 매년 쏟아져 나오는 수천 건의 법안 중 하나로는 가능하지 않다. 입법준비부터 성안까지 전 과정에 사회적 역량이 실려야 한다. 영국 사례를 참고 삼아 새로운 일터 안전·보건법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전제를 몇 가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새로운 법은 반드시 성찰적 입법과정을 거쳐야 한다. 대통령이 선언하고 언론이 집중하고 의회가 자임하고 시민들이 나서고 행정당국을 다그쳐도 왜 손상과 죽음은 반복되고 위험은 관리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사회적 동의에 기반해 시스템을 샅샅이 점검하고 성찰할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준비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법은 포괄적이어야 한다. 사업장의 규모, 고용의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일하는 사람들(persons at work)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과 관련해 발생한 위험부터 일하는 사람들 이외의 사람(persons other than persons at work)까지 포괄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구태여 구분한 산업재해와 시민재해는 모두 일터에서 비롯된 위험이 초래한 결과다. 예방관리에서건 관리실패 결과에 대한 처벌에서건 달리 구분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일터 안전·보건법은 자율규제에 기반해야 한다. 자율규제는 복잡해지고 변화하는 일터 환경과 노동의 시대에 규제항목을 일일이 법에 담아 나열하는 지시적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체적 위험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목표기반 규제를 말한다. 하지만 노동자와 시민들이 다치고 병들고 죽건 말건, 법에서 적시해 규제하는 것만 지키면 문제없다는 관행 속에서 자율규제는 대체로 규제완화와 동일시된다. 이제 법조문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주체가 수행하는 위험성 평가에 기반해 자율규제가 이뤄져야 한다. 책임의 주체는 기업과 노동자가 모두여야 하며, 마땅히 노동자에게도 권한과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더불어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의 포괄적 안전보호의무(General duty clause)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 자율규제는 규제회피가 되고 위험성평가는 형식화된 문서작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포괄적 의무는 안전보건관리 체계란 무엇무엇이고 이행의무란 무엇무엇만 하면 된다는 리스트를 만드느라 훼손되고 말았다.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행위들은 일일이 나열하기보다는 ‘합리적으로 실행가능한(so far as is reasonably practicable)’ 수준으로 위험성에 비례해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성찰적 입법과정 기간 동안 전문가를 포함한 행정관료들은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사업주·경영책임자·기업들이 행한 안전보건조치가 ‘합리적으로 실행가능한’ 수준으로 이뤄졌는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전문성과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서야 법이 작동할 리가 없다.

완전히 새로운 일터 안전·보건법이 필요하다. 수없이 죽고 쓰러졌고 계속 떨어지고 가라앉고 숨이 멎고 있다. 한참 늦었다. 입법자로서 국회가 먼저 나서든 못다 이룬 국정목표 숙제를 위해 행정부가 나서든 바로 지금이 준비하고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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