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선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너무 온건한 법은 거의 준수되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거의 시행되지 못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유명한 법언(法諺)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정부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하자 불분명한 조항이 많아 법 집행 과정에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등의 경영계 반발과 5명 미만 사업장이 처벌 대상에서 제외해 죽음의 차별화를 조장하고 있다는 등의 노동계 반발이 있었다.

이해관계자 모두가 수긍하는 법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회적 합의가 충분해야 법의 현장 이행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누구도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불과 4개월을 앞둔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제는 법 시행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법령상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법 시행 후 예규 등 하위규정을 통해 촘촘하게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영계, 안전에 대한 인식 전환 필요

경영계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모호한 조항이 많고,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법 제정 초기에 만났던 경영계 인사는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기만 해도 처벌을 받는 것으로 오인했다.

중대재해처벌법 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중대산업재해는 과실책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즉, 사업주가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만 처벌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업주·경영책임자 등이 법령에 따른 관리의무를 다한 경우에는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받을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사업주가 자율안전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기 위한 법이다. 이제부터 경영계는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보다 개별 사업장의 구체적인 실정을 반영한 안전관리시스템을 구축해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안전활동의 핵심 주체는 노동자

산업재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현장 노동자 스스로 안전의식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몇 해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 노동자의 안전중시 정도가 비교 대상 15개국 중 12위에 머물렀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현장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인식이 낮으면 그 어떤 법과 제도가 신설돼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동안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제도들이 시행돼 왔지만 아직도 재해사고 사망자 중 56.5%가 떨어짐·끼임·부딪힘 등의 후진국형 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 특히 2020년 기준 사고사망자의 51.9%가 발생하는 건설업 문제는 심각하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개인의 안전의식 못지않게 노동조합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노동조합이 현장 노동자들의 안전활동 참여 및 안전의식 제고와 재해예방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노동조합이 현장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실효성 있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최근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현장 노동자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이나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작업중지권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사업주가 안전 확보를 위한 노동조합 혹은 노동자 대표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진지한 협의를 통해 실효성 있는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노동조합 또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갖고 예방 활동에 나서는 것만이 중대재해를 줄여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특히 현장에 복수의 노조가 존재해도 재해예방을 위한 활동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상급단체인 양대 노총 등도 산재예방을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개발과 이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민간 재해예방기관의 역할 막중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488개 산업안전 및 보건 관련 민간 재해예방기관이 전체 사업장의 약 9.5%인 19만곳의 사업장에서 산업재해 예방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비율은 낮아 보일 수 있으나, 이들 사업장 대부분이 중대재해가 빈발하는 산업재해 취약 사업장이라는 점에서 민간 재해예방기관의 역할이 결코 적다고 볼 수 없다.

특히 민간 재해예방기관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도 유예되고, 안전관리자 선임의무도 없으며, 재정 부담을 이유로 교육 등 기본적인 예방활동이 쉽지 않은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관리 수준을 향상하는 역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해 기준으로 사고성 사망재해의 81%가 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은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대한산업안전협회는 지난 6월부터 협회 회원 사업장의 안전점검을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21년 사고성 중대재해 특별 감소대책’을 수립해 시행해 오고 있으며, 50명 미만 사업장의 경영진(사업주)을 대상으로 한 무료 안전경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민간 재해예방기관은 최근 산업재해가 일반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플랫폼기업, 공공기관, 대형 급식조리실, 벌목현장, 태양광 장비 설치 등 매우 다양한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이에 대응해야 한다. AI나 VR, 드론, 디지털 트윈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재해를 예방하는 전문역량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부, 안전 사각지대 해소 위해 노력해야

정부는 안전의 사각지대를 없앨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기업들은 안전 관련 예산과 인력을 대폭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은 재정 및 안전 전문 인력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준비가 미흡하다. 2019년 기준으로 산재보험에 가입된 사업장 중 50명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98.2%이니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재보험에 가입된 전체 사업장의 1.8%에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50명 미만 사업장도 3년 후인 2024년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만 안전관리체제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곳이 많아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넉넉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 중 하나는 영세 중소기업이 재정 부담에서 벗어나, 전문성을 갖춘 민간 재해예방기관의 컨설팅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관련 재원을 대폭 확충하고, 컨설팅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노동자가 일하다 산업재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고, 기업은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받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사정과 민간부문 모두 깊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시점이다. 이 과정에서 노사 모두 공존과 상생을 위해 한 발씩 양보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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