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뱅갈루루를 떠나 밤새 달린 기차는 남부 인도의 중심 도시 코친의 에르나쿨람역에 새벽 3시 반이 돼서야 도착했다. 그 전날부터 이어지는 기차 여행이라 지겹기는 했지만, 그래도 8시간 반 만에 딱 떨어지게 도착한 걸 위안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동의 시작이라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오늘 목적지인 문나르까지 가려면 또 대여섯 시간은 족히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체력은 여행력! 뱅갈루루에서 챙겨온 바나나 하나를 까먹으면서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짐을 챙겨 내린 에르나쿨람역은 북부의 여느 기차역과는 달리 깔끔하다.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의자들도 많고, 핸드폰 충전용 코드도 여기저기 붙어 있다. 인도의 기차역에서 이런 모습을 본 건 이곳 코친이 처음이었다.

문나르는 우리나라의 보성을 생각하면 딱 맞는 인도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차 재배지이다. 이런 곳을 여행지로 찍은 이유는 인도의 다른 색깔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이나 경적 울리고 시끌벅적한 회색 혹은 잿빛의 인도나 붉은 향신료의 인도 말고, 녹색의 인도는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었다. 사실 여행의 핑계야 만들기 나름이지만.

역에 내려 문나르행 버스를 타야 하는 버스터미널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 역 바로 앞에 프리 페이드 택시 정류장이 있어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었다. 택시를 타려고 줄을 섰더니 매표소 같은 곳에서 1루피를 달라고 한다. 엥? 택시비가 이렇게 싸다고? 갸우뚱거리면서 택시에 올라타 기찻길 옆 비포장도로를 5분쯤 달리니 이내 버스터미널이 나타난다. 오호~ 너무 가까워서 싸게 받았나 보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택시기사가 40루피를 청구한다. 어헐~ 그러면 그렇지. 1루피가 말이 되기나 했냔 말이다.

새벽의 행운이 안개처럼 훠이 훠이 날아간 뒤, 정신줄을 다잡고 문나르로 가는 버스를 찾아 터미널을 헤맨다. 플랫폼이 딱히 지정돼 있지 않고, 안내 표시도 없어서 어느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다. 터미널 매표소 직원부터 시작해서 마주치는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붙잡고 물어보고서야 겨우 문나르행 첫차가 서는 곳을 알아냈다. 오전 5시20분에 출발하는 첫차에 무사히 몸을 실었고, 한 자리씩 차지하는데도 성공했다. 새벽 첫차인데도 사람들을 가득 실은 채 출발하는 것이 인구대국 인도의 위엄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문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창문을 닫으려 보니 웬걸! 유리창이 없고 아래위로 올리는 블라인드 같은 것이 덜렁거리며 달려 있다. 닫으면 암막 커튼처럼 창밖 풍경은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새벽 황소바람은 피해야 하니 별수 없었다.

버스는 흙투성이 산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문나르로 다가간다. 산길을 따라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녹색의 차밭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땅부자는 인도의 대표적인 대기업 ‘타타그룹’이다. 2008년 인도의 모든 저소득층들이 탈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말과 함께 타타 나노라는 180만원짜리 차를 세상에 선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자동차회사가 왜 녹차밭을 갖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여느 재벌들처럼 비업무용부동산으로 투기와 절세술을 시전하는 것일까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약간의 구글 검색만으로도 그런 의심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자세한 얘기는 각자의 검색 능력에 맡겨두고 두 줄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타타그룹은 영국식민지 시절이었던 1800년대 후반 잠셋지 타타라는 인물이 면방직회사를 만든 것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뱀 꼬리말을 좀 더 붙이자면 타타라는 그룹이 인도에서는 자립적 민족주의 상징이기도 하고,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인도 최고의 노동복지 제도 도입 등으로 민심을 얻고 있는 국민 기업이기도 하단다. 물론 구글링과 현실의 싱크로율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꼬박 5시간을 달려서 문나르에 도착했다. 예약한 숙소를 찾아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게 무슨 일? 숙소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저 황무지만 있을 뿐 건물이 아예 없었다. 신종 숙박 사기라도 당한 건가하며 등줄기에 식은땀 두 줄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던 릭샤 기사에게 물어본다. 기사 양반은 숙소 이름을 듣더니 여기가 아니라 버스가 지나온 산중턱에 있다고 알려준다. 순간 뇌를 가득 채운 뉴런들이 요동을 쳤다. 이미 의심쟁이 여행자가 돼버린 나는 이것 또한 신종 릭샤 사기가 아닐까하는 의심의 뉴런망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기사님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릭샤를 타고 온몸으로 비포장길의 진동을 느끼며 산길을 오르는 동안에도 의심병은 나아지질 않았다. 하다 하다 이렇게 납치되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의심은 의심으로만 끝나고 사기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숙소는 정말 산중턱에 있었고, 친절한 기사님이 숙소에 전화를 넣어 마중까지 나오게 배려해 줬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면 정말 내 안의 속물스러움에 혀가 끌끌거려진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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