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빨치산, 독립, 해방, 통일, 꿈, 한,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지리산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물론 천만 명이 넘는다는 산악인들이 종주를 꿈꾸는 마음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그런 지리산을 2005년 소년 빨치산 출신 김영승과 비전향장기수들을 비롯한 통일 원로들이 찾았다.

지리산 반야봉 근처 폭포수골 아래 절벽을 간이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 나오는 바위틈이 있다. 보통의 사내들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낮은 구멍이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호랑이도 찾기 어렵다는 바위굴이다. 그들이 발견한 비트(빨치산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파 놓은 토굴 등의 은신처)에서는 무전통신에 사용했던 전선과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유리병, 수십 개의 폐배터리, 낡은 검정 고무신짝이 뒹굴고 있었다.

▲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박영발의 사진. 당시 36세. 임경석 교수 제공
▲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박영발의 사진. 당시 36세. 임경석 교수 제공

비록 배운 것 없으나 열여덟에 항일독립의 길로

박영발은 1913년 6월12일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는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다. 여기서 ‘집안 사정’이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의 두 집 살림 때문에 빚어진 가족 간 갈등을 말한다.

박영발은 1930년 7월 봉화군 청년들이 만든 비밀 독서회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다. 최근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1930년 7월에 동리에서 박학택·황윤경 등 13인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조직에 참가했다. 그것의 발전으로 1931년 5월에는 봉화적색농민조합 조직에 참가했다. (…) 1932년 2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정길성 동지의 지도 밑에서 경성적색노조준비회라는 지하조직의 연락 공작을 맡았다”고 자신이 운동에 투신한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가 비밀독서회에 참가한 1930년은 농민과 학생·노동자들의 투쟁이 급격하게 분출한 혁명적 고양기였다. 반일시위와 동맹파업 등 학생들의 봉기가 이어졌고 농민들의 소작쟁의도 불이 붙었다. 1930~1931년에는 한 해 평균 300건이던 소작쟁의가 700건으로 폭증했고 농민폭동도 빈번해졌다.

독서회 참가자들도 이러한 정세의 영향을 받아 1931년 5월 봉화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적색농민조합이란 지주와 부농을 배제하고 빈농·중농을 위주로 하는 혁명적 농민단체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다. 박영발은 적색농조에서 조직과 선전을 담당했다. 각 마을 단위로 8개 농민야학을 설립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적색노조의 마을별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조선어와 산수를 가르치고 계급의식 고취에 힘쓰는 한편, 양반과 상민 사이에 평등한 언어를 사용하라고 권유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봉건제도 생활양식이 강했던 경상도 북부지역이 아닌가.

모스크바에서 급거 귀국한 까닭은

소작쟁의도 주도했다. 소작료율을 50%에서 40%로 낮추려고 싸웠다. 머슴의 품삯 인상도 요구했다. 그러나 마을 중소지주들은 대부분 그의 친척이었다. 문중의 배척을 받은 그는 비밀결사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고향을 등졌다.

박영발은 1932년 2월 경성으로 갔다. 그는 고향 선배인 정길성(丁吉成)의 지도하에 경성적색노동조합준비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2년 돌연 일경에 체포된다. 혐의는 레포(연락책)였으나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비밀문서를 씹어 삼키고 거짓 진술을 했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체포 한 달 만에 피투성이가 돼 동료의 등에 업혀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고 앉은뱅이가 된 채로 4년이나 고향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겨우 앉은뱅이 신세에서 벗어난 박영발은 부모의 뜻을 따라 결혼을 하고 생계를 위해 조선과 중국에서 일을 찾아다녔지만, 썩 신통치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발이 다시 운동에 뛰어든 것은 서른두 살이 된 1944년, 해방 직전이었다. 1944년 7월에 정재철·신정균 등과 함께 ‘서울 크룹’을 만들었다. ‘크룹’이란 당조직의 기초인 야체이카(세포)와 그룹의 중간쯤 되는 단위로 보인다. 비밀결사였던 ‘서울 크룹’의 책임자는 정재철이었다. 감옥에서 박영발을 업고 나왔던 사람이다. 박영발은 조직부 책임자로서 영월탄광과 부평조병창의 노동자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부평조병창은 대규모 무기공장으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의 상징이었다. 부평조병창은 1만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던 ‘서울 크룹’의 활동무대였다. 조직 결성 후 1년 만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으나 해방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 후 10일 만에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박영발은 이제야말로 서클주의와 경험주의에서 벗어나 사상에 입각한 조직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1945년 9월20일 그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증번호 1천168번이었다.

당원이 된 박영발은 토건노동조합운동 등 대중운동과 지하당 활동, 1946년 9월 총파업을 이끄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 해방이자 자신의 해방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48년 7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박헌영이 추천했다.

그러나 그의 유학 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했다. 조국에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다.

박헌영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

박영발은 비록 박헌영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그의 노선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남진과 북진을 한 차례씩 겪고 난 후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당기는 대치전이 장기화됐다.

1980년대 이후 출소한 비전향장기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노동당 지도부는 빨치산 해산과 간부들의 월북, 입산자들의 하산과 장기 투쟁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박헌영·이승엽이 주도하는 남로당 연락선에서는 정반대로 남부군을 창설하고 그 대장으로 이현상을 임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 명령을 두고 당시 도당위원장 회의에서는 ‘살벌한’ 논쟁이 벌어졌다. 빨치산 전사들의 생사존망이 걸린 문제였고, ‘남조선 혁명’의 운명이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과 전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는 박헌영의 지시에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제2 전선인 빨치산은 소규모 기동전, 성동격서, 신출귀몰하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 주 임무인데 어떻게 정규군처럼 하나로 모을 수 있는가. 둘째는 지리산처럼 밀림도 후방도 없는 곳에서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면 토벌군에게 몰살당하기 쉽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지리산·덕유산 등의 빨치산에 합류한 사람들도 동조했다. 그러나 결론은 박헌영과 이승엽의 주장이 관철됐다. 그리고 결과는 박영발 등의 주장처럼 대성산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빨치산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박영발은 왜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박헌영의 지시를 거부했을까. 여기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박영발이 인텔리 출신은 아니지만 비밀독서회와 적색농조·노조활동을 통해 대중활동을 하면서 터득한 ‘소통 능력’과 ‘대중들에게 배우는 품성’ 덕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모택동도 이렇게 갈파하지 않았던가. ‘인민과 홍군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물은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빨치산도 대중을 떠나서는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박헌영은 대중들과 너무 멀었고, 박영발은 박헌영과 너무 멀었다.

박영발의 최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954년 3월19일 국군 토벌대와 교전 중 사살됐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954년 2월21일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절망감에 빠진 한 동료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밀 아지트 내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그로 인해 박영발을 포함해 대원 3명이 사망했다는 증언이다.

한때 박영발과 함께 싸웠던 비트를 발견한 김영승의 증언에 따르면 박영발과 동료들은 1954년 2월22일 동굴을 발견한 토벌군이 던진 수류탄으로 목숨을 잃었다. 비서 이정례만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마침 식사를 들고 오던 보위대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뱀사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했다.

박영발이 최후를 맞이한 ‘비트’는 그의 보위대가 반야봉 중허리를 살피다 발견한 천연동굴이다. 박영발은 최후의 순간까지 무전사·비서·견습무전사·의료병 등 8명이 생활하며 북쪽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을 만드는 ‘조국출판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골은 찾을 길이 없다. 토벌대가 시신을 모두 끌어내 인근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한 뒤 체포당한 빨치산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했기 때문이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최근 대선 후보로 나선 검찰 출신의 한 인사는 자신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적이 있고, 그것이 마치 줄서기 하지 않는 정의의 상징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뇌리에 조직이기주의와 권력욕은 있을지언정 ‘국민’은 없다. 그래서 천박하고 오만하다. 자신을 키워 준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민중의 입장’이 아니고, ‘민중을 위한 노선’이 아닐 땐 결단코 반대한 박영발에게 삶의 자세를 배우라고 권한다.

박영발은 지리산에서 함께 싸우고 최후를 맞이했던 이현상·방준표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물론 시신은 없는 가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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