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최상위 문제는 항상 재벌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국 경제는 수출주도 경제이고 수출은 재벌 계열사들이 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곧 재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번 칼럼에서는 2020년대의 여덟 가지 이슈 중 일곱 번째로 기업을 다룬다. 특히 한국의 지배적 기업이라 할 재벌대기업을.

먼저 재벌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부터 정의하고 넘어가겠다. 현대의 기업들은 다양한 형태로 기업집단을 이룬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독립기업 하나가 모든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업별로 다양한 계열사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계열사들이 커질 때 이들을 모아서 기업집단이라 부른다. 재벌은 특수한 형태의 기업집단이다.

두 가지가 특수하다. 첫째, 피라미드형 기업집단이란 점이다. 보통 문어발식 계열사라고도 부른다. 자금력 또는 정경유착을 이용해 돈 되는 사업이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른 기업을 계열사로 흡수하다 보니 모기업을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계열사들이 분포하게 된다.

둘째, 한 가문이 경영권을 이용해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를 지배하고, 또 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족벌 가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부거래 또는 지배구조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재벌이란 한 가문의 사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기업집단을 지칭한다.

이러한 족벌 가문이 지배하는 피라미드형 기업집단은 자본 부족과 제도 미비에 시달리는 저소득 국가의 추격성장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에서도 재벌과 비슷한 기업집단이 경제발전 초기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 차이인데,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뤄진 후에 재벌을 성공적으로 개혁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에 실패한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기업 제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추격성장 이후 재벌개혁에 실패한 나라들이 필연적으로 중진국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캐나다·일본·독일·스웨덴 등에서는 20세기 중반에 재벌을 해체하든지, 아니면 가문의 사익추구가 불가능하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남미·동유럽·동남아시아의 경우 지금도 재벌 비슷한 기업집단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즉 재벌은 저개발 시기의 고도성장에는 유리하지만 고도성장 이후의 수익성·생산성 향상에는 불리한 기업 제도라는 것이다.

한국은 매우 특수한 사례다. 재벌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경제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재벌이란 기업제도가 가지는 본질적 위험과 비효율성이 해결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로 한국은 1970년대 후반 경제 대위기를 겪은 후 1980년대 초반 재벌개혁에 나섰지만, 이후 3저 호황에 취해서 재벌개혁을 미뤘다. 그 결과는 1989~97년 생산성 폭락과 뒤이은 국가부도 사태였다. 만약 3저 호황 와중에도 재벌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면 국가부도라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형 재벌은 성장 여건이 마련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경제가 장기간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위기를 가속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재벌이 뭔가 잘 하고 있는 듯 보일 때, 오히려 개혁을 더 추진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IMF에 의한 재벌개혁으로 생산성이 너무 낮은 재벌들은 퇴출당했다. 또한 회계 투명성이 어느 정도 확보돼 이전 같은 막무가내 회삿돈 빼먹기도 줄었다. 재벌이 부분적으로 합리화한 셈인데, 그럼에도 재벌이 가지는 구조적 비효율성과 부패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이후 주요 재벌의 총수들이 한 번 이상 구속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재벌은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과감한 재벌해체는 현실적으로나 부작용 면에서나 불가능하다. 다른 선진국에서 재벌해체 수준의 개혁에 성공한 경우는 대공황·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이 있는 경우였다. 캐나다의 경우 점진적으로 피라미드형 기업집단을 해체했다. 상속세 등으로 지분을 희석하고, 피라미드 기업집단 유지에 드는 비용(세금)을 증가시켰다. 반독점법을 발전시켜 경쟁을 강화하고, 주주가 족벌을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이 통했다. 한국도 현실적으로는 이런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당장 삼성·현대차 등의 경영권 3세 승계부터 쟁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과정에서 박근혜 게이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만들어 구속됐다. 여러 재벌 그룹에서 3세 승계가 이뤄지고 있다. 문어발식 계열사 축소, 내부거래 규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경영 참여, 이사회 감시, 주주 소송 확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족벌의 경영권 세습에 규제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재벌개혁 과정에서 국부유출이 발생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존재한다. 하지만 초국적 투기자본에 의한 기업사냥은 과장된 쟁점이다. 오히려 족벌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주주를 달래기 위한 과도한 배당 등 부의 이전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세계적으로 봐도 재벌개혁에 실패해 중진국 함정에 빠진 사례는 많아도, 재벌을 외국인에게 빼앗겨 경제성장에 실패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재벌개혁이 신자유주의 아니냐는 쟁점도 있다. 두 가지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 피라미드형 기업집단을 개혁하는 건 신자유주의 여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비효율적 기업제도이자 다른 사회 제도의 부패를 동반하는 제도를 개혁하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보통 잘 거론되지는 않지만, 노조에 의한 재벌개혁 방법도 있다. 산별노조나 총연맹이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면 사익추구에 몰입해 있는 족벌 경영진이 버티기 어렵다. 피라미드를 해체하든지 국민경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사익을 스스로 규제해야 한다. 스웨덴의 재벌개혁이 이런 종류의 대표적 사례로 유명하다. 다만 한국의 경우 이런 식의 개혁을 추구하려면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산별노조와 노총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기업별 노조는 재벌을 개혁하는 것보다 재벌과 지대를 공유하는 걸 선호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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