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1962년 3월 네 윈(1911~2002년)의 혁명평의회가 창당한 버마사회주의강령당(BSPP)은 1988년 9월까지 26년간 미얀마를 통치했다. 1964년 네 윈의 혁명평의회는 버마사회주의강령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일당지배체제를 수립했다.

1967년 6월 일어난 반중국 폭동은 미얀마 군부와 중국공산당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폭동은 미얀마 전국 288개 지역에서 일어나 110만명 넘게 가담했다. 이를 기회로 혁명평의회는 친공산 언론사를 폐간시키는 등 버마공산당의 합법 기반을 박살 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미얀마 화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반중국 폭동이 일어날 때까지 중국공산당이 버마공산당을 지원하는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폭력혁명을 교사하기는커녕 버마공산당이 통일전선 전략하에 미얀마 정부와 평화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1968년 1월1일 버마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항한 빨치산 전쟁을 개시했다. 중국 윈난성과 인접한 동북국경 산악지대에서 경상북도 넓이의 지역을 점령하고 ‘해방구’를 건설했다. 버마공산당 게릴라전을 위한 중국의 무력지원은 1970년 11월 중국 정부가 미얀마에 자국 대사를 다시 보낸 후에도 계속됐고, 중국공산당이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통해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화하기 직전인 1978년 10월 말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얀마 군부는 버마공산당을 제어하는 최선의 방법이 중국공산당과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게 됐다. 버마공산당도 중국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내부 분열을 겪었다. 미얀마 군부는 남중부 평야지대에서 공산당 진압작전을 활발히 펼쳤지만, 중국에 맞닿은 동북부 국경지대에서는 방어적으로 행동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중립을 견지하면서 소련과 미국의 외교·군사적 구애에 응하지 않았다.

1975년 버마공산당은 중부 평야지대에서 기반을 상실하고 동북부 산악지대로 퇴각했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의 영향력하에 있던 버마공산당은 1976년 7월 중국공산당 내부의 강경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덩샤오핑 노선이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 사상을 벗어났다고 비난했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1977년 7월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1904~1997년)이 권력을 장악하자 양당 관계는 소원해졌다. 참고로 버마공산당은 1989년 4월 최종 붕괴했다. 잔당들은 소수민족 무장단체인 샨(Shan)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민주동맹군(NDAA)과 코캉(Kokang) 민족주의 성향의 미얀마국민민주동맹군(MMDAA) 등을 결성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망 후 ‘정부 대 정부’ 관계는 개선됐다. 1977년 2월 저우언라이(1898~1976년)의 미망인 덩잉차오(1904~1992년)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의장 자격으로 양곤을 방문해 네 윈을 만났다.(그의 남편 저우언라이는 수상 자격으로 1954년 6월부터 1965년 4월까지 아홉 번이나 미얀마를 방문했었다). 이에 화답해 네 윈은 대통령 자격으로 1977년 4월과 9월 중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고 다음해 1월 덩샤오핑이 미얀마를 답방함으로써 ‘정부 대 정부 관계’가 회복됐다.

하지만 1979년 7월 미얀마는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 회의를 통해 출범한 비동맹운동(NAM)을 탈퇴했다. 원래 목적인 중립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를 댔다. 이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비동맹운동의 지지가 필요했던 중국을 실망시켰다.

1980년 2월 네 윈이 대통령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미얀마 정부가 버마공산당과 평화협상을 벌일 것을 요구했고, 네 윈은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였다. 동남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소련과 베트남에 반대하라는 중국의 요구도 미얀마 군사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1980년 5월28일 버마사회주의강령당 정부는 사면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해외에서 무장단체를 꾸렸던 초대 수상 우 누(1907~1995년) 등 망명객들이 대거 미얀마로 돌아왔다. 버마공산당원 456명을 비롯해 정치범과 빨치산 수천명도 감옥에서 풀려났다.

1980년대 들어 양국의 긴장관계는 해빙 무드로 돌아섰다. 1985년 3월5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리셴녠(1909~1992년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두 달 후 네 윈이 버마사회주의강령당 당수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공산당과 ‘당 대 당 관계’를 논의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1915~1989년)과 만나 버마공산당 문제를 제기했다.

1980년대 말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버마공산당과의 ‘당 대 당 관계’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했다. 대신 외교정책의 방향을 경제협력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정부 대 정부 관계’ 강화로 선회했다. 이후 중국 윈난성에 있던 버마공산당의 인력과 시설은 국경을 넘어 미얀마로 돌아가게 됐다. 중국공산당의 무기와 재정 지원도 1987년 이후 중단됐다. 이로써 1968년 반중국 폭동 이후 양국관계를 긴장시켰던 정치·군사적 대립은 끝났다. 경제협력과 국민교류가 이십년 만에 회복된 것이다.

정치·경제 상황이 안정되면서 미얀마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가 커졌다. 이는 1988년 8월8일의 ‘8888 항쟁’으로 폭발했다. ‘버마식 사회주의’ 실패로 인한 부패와 빈곤의 만연에 대항한 양곤 대학생들의 투쟁에 전국의 민중들이 동참했다. 정세가 불안해지자 1988년 9월18일 소 마웅(1928~1997년)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군부는 버마사회주의강령당 정부를 해산하고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를 출범시켰다. 소 마웅이 이끄는 두 번째 군사정권은 다당제를 보장한 총선거를 1990년에 실시한다고 약속했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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