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화 행동하는 간호사회 회장

저는 지방의 작은 민간 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그리고 17년 경력단절 경험이 있는 13년차 간호사입니다. 30년 전 저는 국비로 등록금은 물론 숙식을 제공받으며 학업을 유지했고 졸업과 면허 취득 후 공공의료기관 중환자실에서 의무복무 3년의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불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응급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실로 나온,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환자를 간호할 땐 정말 뿌듯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공공의료 현장의 모습은 간호사로서 직업적 보람을 만끽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근무 1년6개월 만에 사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악한 간호인력 상황에 내 업무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맞는지 깊은 회의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10개 병상을 보조인력 없이 오롯이 간호사 3인이 나눠 관리하는 시스템 속에서 심정지라도 발생하면 두 명의 간호사는 응급환자에게 매달려야 했고 한 명의 간호사가 나머지 환자 모두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거기에 어떤 질적인 간호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결국 회의감에 사직서를 던질 수밖에 없었고, 의무 복무를 채우지 못한 기간만큼 반환금을 낸 후 휴식 기간을 거쳐 새로운 직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엔 현재 제가 근무하는 병원과 지역의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공공의료원과 함께 지역에서 유일한 민간종합병원인 제 근무지에서는 2교대 근무가 비일비재합니다. 간호인력 부족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면허를 가지고서도 일하지 않는 간호사들은 지역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부정책에 따라 간호대 정원이 근 10년간 두 배로 증원됐지만, 면허간호사 중 절반이 넘는 간호사(51.9%)가 현장을 떠나고 있는 통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간호사가 없는 게 아니라 간호업무가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최근 일에 지쳐 울었던 동료 간호사는 급기야 생리불순 등 건강상 이상신호를 느끼며 사직을 예고했습니다. 이렇듯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인 2교대 근무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역 공공의료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가 열악한 급여 조건을 피해 민간병원인 제 근무지로 이직해 오기도 합니다. 힘들더라도 2교대 근무를 해야만 어느 정도 만족할 급여 수준이 되니까요.

하지만 병원쪽에서는 2교대 근무를 3교대 근무로 돌리라고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12시간의 장시간 노동보다 8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충분한 인력 확보 없이 2교대 근무에서 3교대 근무로 돌리기 위해서는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수를 늘리고 노동강도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의 병동에서 10개월 정도 근무하는 동안 6명의 간호사가 퇴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간혹 집단 사직서를 내는 병동들이 있지만 병원쪽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경력자들보다 급여를 높여 모집공고를 내니 새로 입사 지원하는 간호사들이 당연히 줄을 서니까요. 처우만 개선된다면 일하려는 간호사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최근 한두 달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한편 병원은 근무자들의 동의 없이 임금을 삭감했다가 반발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이런 부당한 대우에 집단 사직서를 쓰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직서를 던지기에는 일상이 녹록지 않습니다. 젊은 간호사들은 서울·수도권으로 이직할 여유가 있지만 높은 연차의 기혼 간호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성의 직장 문제로 한 가정의 거주지를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이런 민간병원의 횡포가 가능한 것은 지역에 선택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많지도 않거니와 다른 선택지는 근무조건이 더 열악한 공공의료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역의 공공병원이든 민간병원이든 희망 없는 간호노동은 조금의 개선도 없이 꾸역꾸역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공공간호사제라니요. 5년이라는 장기 의무복무 기간에,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면허취소를 하겠다는 협박으로 지역의 열악한 간호 현실에 간호사들을 강제로 묶어 두겠다는 발상을 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젊은 날 높은 노동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3년의 의무복무를 채우지 못한 저에게 면허취소라는 단서조항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죽지 못해 버텼을까요? 아니면 어렵게 취득한 간호사 면허가 취소되는 것을 각오하고 그래도 사직서를 던질 용기를 내었을까요? 어느 것이었든 끔찍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보건복지부가 대한병원협회와 함께 이렇게 배출되는 지역공공간호사를 공공병원뿐만 아니라 필수·공공의료를 제공하는 민간병원에도 배치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된다면 지역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돼 있으며, 응급실에 공보의가 근무하는 민간병원인 제 근무지에도 지역공공간호사가 의무복무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의 열악한 간호 현실을 더욱 굳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분위기는 전국의 모든 병원으로 확대·강화될 것입니다. 사람을 못 구해서 임금 올렸다가 다시 슬쩍 내렸던 병원이, 이제 다른 돈 안 들여도 정부에서 5년짜리 인력을 준다는데 처우개선을 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지역의 간호인력 확보는 열악한 근무조건 개선 없이는 실현 불가능합니다. 당장 공공의료원의 간호 현실부터 개선이 되지 않으면 민간병원의 간호 현실도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역으로 공공의료원의 열악한 간호 현실이 개선된다면 굳이 장학금을 빌미로 간호사들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지역공공간호사제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간호사 1인당 환자수를 법제화해 고강도 간호노동에서 간호사들이 숨 쉴 수 있도록 하고, 수도권의 70%에 불과한 지역의 간호사 급여 수준을 개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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