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할 일도 많고 할 말도 많으니 ‘할많할많’이라 이름 붙인 연재칼럼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내놓을 말을 찾는 일이 늘 어렵고 버겁다. 네 명의 활동가가 돌아가며 글을 쓰고 있어, 한 번 글을 보낸 이후 다음 마감까지 3주의 시간이 있는데, 늘 마감 당일 새벽이 돼서야 겨우 첫 문장을 시작한다. 그 모든 말들의 의미가 무엇일지, 알기 어렵다. 이 모든 단어들의 무게를 나는 책임지고 있는지, 더 모르겠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 두던 마감의 새벽을 앞둔 저녁, 초인종이 울렸다. 같은 오피스텔 건물 바로 옆 호에 살고 있는 이웃이다. 문이 열리자 비타민 음료 열 병이 담긴 묵직한 상자와 함께 눈을 맞춰 인사를 건네곤 이내 돌아선다.

그가 누른 초인종이 처음 소리를 낸 것은 지난 주말 한밤이었다. 우리는 벽 하나를 맞대어 살고 있는 이웃이다. 하지만 ‘바쁘고 바쁜 현대 사회’에 걸맞게, 서로의 이런 저런 사정에는 훤하지 못하다. 다만 드물지 않게, 건물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눈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왔다.

그날 밤 그의 사정은 사라진 지갑이었다.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어려운 그는 러시아어가 모어인 고려인 이주민이다. 수차례 휴대폰 번역앱으로 필담을 이어 간 끝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갑 속 자리했던 두 장의 체크카드에 대한 분실신고 절차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 다른 조치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분실 신고를 위해 필요한 그의 개인정보를 내가 알 자격이 있는 건지, 고민 끝에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원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한밤임에도 연락이 닿아 필요한 조치를 확인하고 여러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규정상, 기관에서는 분실신고를 위한 정보를 수집해 대리할 수 없었다.

건물 복도에서 그의 집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건네 준 외국인등록증과 통장들, 여러 정보들이 적힌 종이 조각을 더듬어 분실신고를 마쳤다. 은행과 통화가 길어지는 동안 그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야간 근무 중인 남편과의 통화가 쉽지 않았다. 나도 며칠에 한 번은, 지역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자동차부품 공장의 이름이 적힌 작업복을 입고 저녁 무렵 건물을 나서는 그의 남편을 스치는 일이 있었다.

분실 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내 방안에서 어쩐지 서러웠다. 벽 하나 너머의 이웃은 지갑을 잃어버린 일상의 작은 소란 탓에, 이름도 모를 사람에게 수많은 정보를 노출해야 했다. 누구나 겪는 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무엇도 책임지지 않아도 문제없을 타인의 선의에 매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안인가.

2주 전 주말에는 아산의 한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던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생산 공정 마다 단 한 명의 노동자만 배치한 탓에 업무는 늘 과중했다. 그는 동료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그 몫의 일까지 대신하다 산업용 로봇에 머리가 끼는 사고로 숨을 거뒀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그 역시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고려인 노동자였다. 두 살 난 아이,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사고가 나기 4일 전, 센터는 도의회와 함께 지역 고려인 이주 현실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난 겨울 진행한 고려인 노동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고려인 이주노동자들이 마주한 장시간·고위험·불안정 노동의 현실과 그에 대한 나름의 여러 대안을 이야기했지만, 바로 4일 뒤에 있을 참사를 막지는 못했다.

사고 이후, 도움을 구하는 유족과 유족을 찾는 지역 활동가들 사이에 연락이 닿기까지 수일이 걸렸다. 그 사이 이미 유족과 회사의 합의가 이뤄졌다. 너무 단촐해 서러운 장례도 치러졌다.

물어 물어 어렵게 닿은 유족의 연락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어려웠다.

무언가를 주장할 용기를 내기가 더없이 어려워, 오늘은 그저 이 절망과 무력에 대해 적어 둔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 우리 모두는 떠나 온, 떠나는 이주민이다.

자본에게는 너그럽고 유약한 국경은, 다만 살아갈 땅을 찾는 이들에게는 늘 가혹하고 견고하기만 하다.

일과 삶의 존엄과 안정이 제도 밖 불확실한 선의와 유대에 매여 있는 이 불안과 야만 앞의 무력함을 적어 두고 기억하려 한다.

무책임한 이 문장들 사이에서 다만 남겨진 질문들을 되짚는다. 무력함과 다툰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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