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이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뒤 7년이 지나는 사이 아픔이 촛불이 되고, 정치적 책임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이 바뀌고, 여당은 180석 가까운 의석을 확보했다. 그런데도 재난은 지금도 주변에 가까이 있다. 감염병 환란에 더 가난한 사람이 더 큰 타격을 입는 부조리가 여전하다. 세월호 참사 7년 우리는 어디까지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안전사회운동을 새롭게 만들어 내자
박래군 4·16재단 운영위원장(인권재단 사람 소장)
 

▲ 박래군 4·16재단 운영위원장(인권재단 사람 소장)
▲ 박래군 4·16재단 운영위원장(인권재단 사람 소장)

세월호 참사 7주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점을 가장 먼저 꼽으라고 하면 먼저 안전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안전사회를 향한 운동이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느낌이다. 당사자를 넘어선 시민 모두의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세월호 참사 투쟁에 여전히 함께하는 시민들이 있고, 노동자들만의 문제로 인식되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국회에서 통과한 것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다) 제정운동에서도 확인됐다. 지난 13일 열린 ‘재난·산재 참사 기록·증언회’는 2003년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이후 17건의 참사, 산재 사망사건 관련 피해자와 활동가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자리였다. 이 증언회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참사의 공통점으로 무책임 구조를 꼽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비용 문제로 치부하고, 말단 책임자만 약한 처벌을 받는 구조, 거기에 부정부패가 결합돼 있어서 같은 유형의 재난 참사, 산재 참사가 반복된다는 점을 짚었다.

이런 문제를 넘기 위해서는 ‘안전권’을 기본권으로 확립하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 안전권은 “모든 사람은 성별·종교·국적·인종·세대·지역·사회적 신분·경제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일상생활과 노동현장에서 안전사고와 위험에서 생명·신체·재산을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 권리”(국회에 발의된 ‘생명안전기본법’안 3조)를 말한다. 안전을 기본권으로 확립하고, 그에 따라서 국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책무를 지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수렴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두가 차별 없이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안전과 관련한 대책들을 쏟아 내고 있고, 민관 협치에 바탕을 둔 안전 거버넌스 기구들이 가동되고 있으며, 안전교육을 강화하고, 매년 국가 안전대진단도 시행하고, 5년 단위로 안전기본계획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빈 깡통이다. 그러니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그간의 안전대책과 정책들도 점검하고 정부와 지자체, 기업의 안전 관련 인식과 문화 구조를 바꿔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민간의 안전사회운동이 발전해야만 한다. 안전사회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한 분야로 정착되고, 안전 분야 전문가와 활동가들의 역량이 커져야 하고, 거기에 피해 당사자들의 경험이 결합돼야 한다.

세월호 참사 같은, 또는 제천스포츠센터 화재참사 같은, 이천 물류센터 화재참사 같은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거기에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참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까지 예상한다면 안전사회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무척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부터 우리가 일하는 현장을 안전하게 만들기, 시민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부터 안전하게 만들어 가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세월호 참사 때 우리는 약속했다. ‘4·16 이후는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고. 이제 그 다짐을 안전사회운동으로 실현해 내야 할 때다.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기억하려면
박상은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플랫폼C 활동가)
 

박상은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플랫폼C 활동가)
▲ 박상은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플랫폼C 활동가)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이 돌아왔다. 매년 4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인데, 아직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잊지 않기 위해서는 당시의 생생한 고통과 분노를 다시 소환하는 방법밖에 없다. 왜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실패했는가. 7년이 지난 지금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부와 관료의 방해 때문이라며 외부 탓으로 돌리기에는 문재인 정부 이후 활동한 선체조사위원회의 침몰 원인 합의 실패,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지지부진한 활동이 뼈아프다. 왜 조사위원회 활동이 진행될수록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첫째,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하나의 서사, 종합적인 그림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체조사위의 합의되지 않은 두 안(‘내인설’, ‘열린 안’)은 80% 이상 유사하다. 내인설과 열린 안은 AIS 항적에 조작이 없었던 점, 세월호는 10도 이상 기울면 이후 30도까지 빠르게 기우는 특징이 있는 배였다는 점, 수밀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빠르게 침몰했다는 점 등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선체조사위가 종료된 후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하나의 합의된 서사 없이 애써 밝힌 단편적인 사실은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둘째, 조사위원회가 조사가 아니라 수사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수사는 개인 처벌을 위한 것, 조사는 그에 한정하지 않는 원인을 밝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해경 지휘부, 청와대 등 정부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으면서 조사위원회는 개인 처벌을 위한 조사에 집중하게 되고, 안전사회를 위한 구조적 원인 조사는 손을 놓게 됐다. 이 경향은 사회적참사특조위에서 가장 심해서, 모든 조사는 결국 검찰 수사 의뢰로 귀결됐다. 그러나 검찰이 대부분을 무혐의 처리하고, 그나마 검찰이 기소한 해경 지휘부 사건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사법부의 의지 문제도 있지만, 법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특조위가 계속 ‘수사 의뢰’를 목표로 조사를 진행하면 결국 진실의 최종 판단을 검찰이 하게 되는 셈이다. 대다수 시민은 특조위의 결론이 아니라 검찰과 법원의 결론을 진실이라고 믿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의도나 지시 여부를 찾는 조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재난은 보통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겹쳐 발생한다. 그래서 재난의 책임을 묻는 것은 항상 어렵다. 잘못한 이들은 다른 잘못한 이를 탓한다. 국민을 구하는 데 실패한 정부가 청해진해운과 선원을 탓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책임자들은 구조 뒤로 숨으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 명령하고 지시해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을 수 있다는 개인 책임이 분명해 보이는 서사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반대로 책임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에도 기업과 국가의 책임이 없지 않다. 흩어지는 책임 뒤로 기업과 국가가 숨어 버리는 메커니즘을 지적할 때, 세월호 참사의 서사는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회적 애도의 가장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