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윤 한국노총 정책2본부 차장

지난해 말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개정된 이후 3개 ILO 기본협약 비준동의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노조법은 협약 비준에 당장 장애가 되는 최소한의 조항만 다듬는 수준으로 개정돼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하다. 특히 올해는 우리나라가 ILO에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지금이라도 ILO 회원국으로서 위상에 걸맞은 노조법과 관계법령 정비를 하는 게 도리다.

그런데 한국경총이 지난 9일 발표한 ‘노조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 관련 경영계 보완요구사항’은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 문제는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문제로까지 비화된 상태다. ILO 기본협약 비준과 이에 따른 노조법 개정은 경총을 비롯한 재계가 강조하는 ‘글로벌 경쟁력’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배신행위’에서 조속히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경총은 개정 노조법 시행시 산업현장의 대립적·갈등적 노사관계가 심화될 것이라며 노조법 하위법령 보완을 요구했다.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경총이 우려하는 대립적·갈등적 노사관계는 다름 아닌 경찰력의 과도한 간섭과 개입을 남용한 노조법에서 연유한다. 노조법 뿌리가 바로 ‘치안경찰법’이다. 현행 노조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 3권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법률이 아니다. 오히려 정당한 노조활동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법률로 기능하고 있다. 노조법이 현장 노사분쟁 예방과 해결은커녕 노사 간 분쟁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장에 ‘노사자치·협약자치의 원칙’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노조법을 대폭 정비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ILO 기본협약 비준은 바로 ‘원칙 재정립’으로 이어져야 한다.

경총 요구사항은 사업장 내 조합활동시 사용자의 ‘사전승인’, 사용자 점유배제 쟁의행위시 ‘행정관청과 관할 노동위원회 신고’, 종사조합원과 비종사조합원을 구분한 ‘변경사항 신고의무 부과’ 및 ‘단체교섭 요구시 제출’이다. 이런 요구는 조합 운영과 노사분쟁 해결에 과도한 공권력 개입과 의존이 전제돼 있다. 이는 노사의 자율적 교섭·협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사안이지 국가행정이 간여할 부분이 아니다. 또한 경총 요구대로 교섭대표노조 유지기간을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하면, 신생노조 및 소수노조 등의 교섭권이 심각하게 제약받게 된다. 결국 현장 노조활동 및 노사질서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노조 설립신고 이후 접수취소절차 마련 요구는 지난해 대법원 판례를 통해 불법이 확인된 ‘법외노조 통보’ 제도를 사실상 부활시키는 것이므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내용이다.

사실 위에 언급한 사항들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ILO 기본협약 비준 및 노조법 개정 국면에서 노동계가 이미 수차례에 걸쳐 ILO 기본협약 비준 취지, 즉 국제기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들이다. 이제 ‘진도’를 나가야 한다. 노조법 개정으로 인한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현장 단위의 자율적 노사교섭을 최대한 촉진·지원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노조법 시행령·시행규칙 역시 이와 같은 기본방향에서 관련 내용이 반영되고 정비돼야 한다. 그 첫걸음은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 관련 법률상 근거 없는 시행령의 ‘사업 또는 사업장의 전체 조합원수와 사용인원’을 제한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교섭창구 단일화시 사용자가 교섭요구사실을 공고하지 않고 노동위원회 시정결정도 따르지 않는 경우 이에 대한 조치방안을 세부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행정관청의 법외노조 통보가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관련 시행령을 삭제하는 등 정비작업도 이뤄져야 한다. ILO 기본협약 비준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이상 그에 따른 노조법 등 관계법령에 대한 ‘원칙 재정립’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