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2월26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29호·87호·98호를 비준했다. 사용자단체들은 정부가 노동조합 편을 든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번 비준은 노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지지나 지원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강제노동’ 협약인 29호는 노예노동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임금 노동(free wage labour)’으로 대체하라는 협약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징집과 위안부가 바로 이 문제다. 1930년 6월28일 열린 ILO 국제노동회의에서 채택돼 1932년 5월1일 발효된 29호 협약을 일제는 1932년 11월21일 비준했다. 90년 전 일본이 비준한 29호 협약을 2021년 한국 정부가 뒤늦게 비준한 것이다.

‘결사의 자유’ 협약 87호는 1948년 7월9일 열린 ILO 국제노동회의에서 채택됐다.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한 때가 1948년 12월10일이고, 그 여섯 달 전에 만들어진 ILO 87호 협약은 당연히 유엔이 만든 세계인권선언의 기초가 됐다. 세계인권선언 20조는 “모든 사람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23조는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의 보호를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21조는 “모든 국민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밝혔다.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를 되풀이한 국제기준이 87호 협약이다.

87호 협약 비준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자본가만이 온전히 누린 결사의 자유를 노동자에도 공평하게 보장하겠다는 정치적 약속에 불과하다.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87호를 거부하는 것은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헌법에 시비를 거는 행위와 같다. 결사의 자유는 자유와 민주의 출발점이다.

98호 협약은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데에 사용자가 해서는 안 될 부당노동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규정하고 있다.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른 사용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들어 있었다. 따라서 필자가 사기극이라 보는 ‘선 입법-후 비준’ 입장에서도 98호 비준은 대단히 늦었다. 입법이 완료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ILO에 가입할 당시에 98호를 비준했더라도 국내법과의 충돌은 없었을 것이다.

기본협약 비준은 대한민국과 국제 사회의 법과 제도 안에 이미 존재해 온 원칙들을 국회의 비준이라는 정치적 행위로 재차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29호·87호·98호 협약을 비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ILO의 8개 기본협약 중 7개를 비준하게 됐다. 전체 190개 협약 중에서는 기존의 29개에서 세 개를 더해 모두 32개를 비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ILO 기본협약 중 하나인 ‘강제노동 금지’ 협약 105호 비준에는 소극적이다. 기성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견해 또는 사상적 견해를 표현하는 행위와 파업 참가를 처벌하는 수단으로서 강제노동을 악용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105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ILO 187개 회원국 중 11개에 불과하다. 브루나이·중국·일본·라오스·마샬 군도·미얀마·팔라우·동티모르·통가·투발루·대한민국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나라라서 비준을 안 한다 치고, 일본은 한국보다 민주주의가 덜 발달한 나라라서 비준을 안 한다 치자. 그런데 지배 엘리트들이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 운운하는 대한민국은 왜 아직도 105호를 비준하지 않을까. 협약 105호는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안건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헌법 22조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이미 대한민국 헌법에는 협약 105호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

이름에 들어간 ‘노동(Labour)’이란 단어 때문에 ILO를 대단히 진보적인 국제기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1919년 가을 탄생한 ILO는 세계 전쟁을 예방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억제하려는 보수적인 목적하에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등장했다. 1917년 11월 일어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ILO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ILO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항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안전판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위한 전제 조건이 ILO가 만드는 국제노동기준, 즉 자본과 노동의 공생 조건이 되는 협약과 권고를 회원국 정부가 적극 실천하는 것이다.

190개 협약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8개 기본협약이다. 그중 이번에 국회가 비준한 것은 조선총독부 시절인 1930년에 만들어진 29호, 한국전쟁이 터지기도 전인 1948년과 1949년에 만들어진 87호와 98호다. 이승만 독재 시절인 1957년에 만들어진 105호를 비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노동운동 안에서도 미약하다. 지금부터는 105호와 더불어 ILO 협약 190개의 절대다수인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 178개에 주목해야 한다. 근무시간과 안전보건, 모성보호 등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 즉 일터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기술협약들이 규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협약 178개 중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22개에 불과하다. 사실 진정한 ‘핵심’협약은 기술협약들이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l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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