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20년 넘게 하이트 생맥주 서비스 업무를 해 왔습니다. 스물여덟에 시작해 지금 쉰 살이 다 됐으니 청춘을 바친 셈이죠. 적은 월급이지만 이 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 뿌듯함은 비수가 돼 마음에 꽂혔습니다.”

함경식(48·사진) 서해인사이트노조 위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하이트진로 하청업체 서해인사이트가 회사를 청산·폐업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서해인사이트는 지난 8일 노동자들에게 “2월 말일부로 법인 청산·폐업 절차를 밟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서해인사이트가 하이트진로에서 업무를 수급한 지 8년 만이다. 노동자 200여명은 해고 위기에 놓였다. 회사는 “내부 경영 사정”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노조는 “노조와해 목적”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전국 호프집에서 하이트 생맥주기계를 설치·유지·보수·관리하는 노동자들이 지난해 10월30일 처음으로 노조를 설립하자 두 달 만에 폐업을 결정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노조는 “실제 회사 관리자가 노동자들에게 ‘노조가 유지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식품산업노련 사무실에서 함 위원장을 만났다.

“3년 1번씩 1%씩 임금인상, 노조 만들자 폐업”

- 회사가 폐업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회사는 ‘도급업체 특성상 도급비 외에는 수입이 없어서 사업 확장성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우리는 노조와해가 목적이라고 본다. 노조설립 뒤 노조는 회사의 퇴직금 축소 지급 사실을 밝혀냈고, 회사에 도급비 내역을 비롯한 경영 전반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노조에 대한 부담으로 회사가 폐업이라는 ‘선수’를 치는 것 같다. 실제 노사교섭 자리에서 회사는 ‘우리가 노조 요구를 들어주면 원상복구를 시켜줄 수 있나’는 취지로 말한 적도 있다. ‘노조를 그만둘 수 있냐’는 의미로 해석되는 말이다. 업체 폐업에는 하이트진로가 개입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원청의 지시에 서해인사이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원청에서 보전을 받고 폐업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의혹이다. 특히 원청은 서해인사이트에 사업 종료를 통보한 직후인 지난 6일 3개 수탁업체를 선정하는 내용의 입찰공고를 냈다. 그 전까진 업체가 바뀌더라도 단일 업체로 업무가 넘겨졌는데, 이번엔 업무를 3개 업체로 쪼개 넘기겠다는 것이다. 직원을 분산시켜 노조로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 노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다. 우리는 거의 3년에 한 번씩 기본급의 1% 수준으로 급여가 인상돼 왔다.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인상률이다. 수도권 지역의 경우 일부 소장들의 폭언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또 노동자들은 업무가 끝나도 거래처나 회사 관리자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제재가 가해진다. 거래처는 주로 밤에 영업을 하다 보니 전화가 밤 12시, 새벽 2시에 올 때도 있다. 휴가 때도 전화가 올까 봐 물놀이도 오래 하지 못한다. 휴대전화의 노예 같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하이트진로, 노동자 직접고용해야”

- 원청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원청인 하이트진로가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가 2000년 이 일을 할 때만 해도 하이트 생맥주 서비스 노동자들은 원청 계약직이었다. 그러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제정을 앞두고 2004년께 회사가 해당 업무를 도급업체에 위탁했다. 우리를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기 위한 ‘꼼수’였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원래 원청 노동자였던 만큼 다시 원청에 직접고용돼야 한다고 본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직접고용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우리는 원청 직원에게도 지시를 받고, 원청과 사무실도 같이 쓰고, 작업 공구도 원청이 구매한 것으로 쓰고 있다. 원청 직원들이 사용하는 앱 ‘하이트로’를 같이 사용하면서 원청에서 작업지시를 받기도 한다. 일할 때도 ‘테라’ ‘진로’ ‘참이슬’ 같은 원청 제품 이름이 적힌 옷을 입거나 차를 타고 다니면서 한다. 우리를 원청 직원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적지 않다. 또 업체가 3개로 분산되면 업체끼리 경쟁이 붙어 노동조건이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으니 신규업체로는 지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 폐업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대응 계획이 있나.
“쟁의권을 확보하기 전까진 천막농성이나 준법 집회를 하려고 준비 중이다. 현재 2021년 임금·단체협상 중인데 쟁의조정에 들어가서 쟁의권을 확보하면 폐업 전까지 파업에 들어가려 한다. 마지막 교섭이 이달 21일이다. 처음 하는 파업이라 어려움도 있지만 조합원들에게 투쟁기금도 모았고 원청 노조도 연대하겠다고 했다. 하이트진로와 우리는 회식이나 단합대회도 같이해 왔다. 그런 자리에서 항상 같이 외치는 구호가 ‘우리는 하나다’였다. 회사가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노동자들은 이 업무를 위해 희생해 왔는데 하이트진로가 우리를 진정 하나로 생각한 것이 맞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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