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축구평론가

나는 상상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인적으로 어수선했고 사회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웠던 2020년이 저무는 지금, 나는 2021년의 스포츠문화를 상상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이보쇼, 평론가 양반. 이 시국에 상상이 무슨 말이며 더욱이 2021년은 무슨 소리요, 당신은 뉴스도 안 보….”

딴은 그렇다. 코로나19의 해를 어렵게 보내고 있지만 다가올 새해도 당분간은 코로나19에 휩싸여 지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상할 권리마저 차압당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상상하고 싶다. 차디차고 혼란스러운 겨울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해의 봄이 되면 그래도 새롭고 신성한 기운이 가득 차서 많은 사람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산책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서너 달 후에 개막하게 되는 프로스포츠를 ‘직관’하러 가는 풍경, 그런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고 싶다.

몸은 국가 위상의 척도, 경쟁 도구?

스포츠의 역사, 좀 더 넓게는 근대 이후의 파란 많은 역사적 격동 이후 몸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더욱 사랑하고 돌보고 나아가 좀 더 건강하게 다지려는 경향을 늘 있었다.

물론 ‘강한 신체’(Toughness culture)에 대한 과도한 열망은 종종 극단적 정치적 열망으로 연결돼 일종의 ‘파시즘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유럽 전역에서 크게 발달한 근대 스포츠가 각각 ‘대영제국의 엘리트 신체’(영국)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파괴된 독일 청소년 문화의 강한 복원(독일) 및 강대국에 맞서는 유럽 여러 약소국의 청소년 체력 강화 교육으로 전개된 바 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범국이든 자국의 국가적 위상을 국민 개개인의 강한 체력으로 증강하려는 사례도 있었다.

20세기 최강자로 떠오른 미국에서도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50~60년대에 ‘강한 신체’ 신드롬이 크게 번졌고 베트남 전쟁 이후에는 그 나름의 상흔과 고통을 ‘람보’의 방식으로 보상하려는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갑자기 미 대륙을 쉼 없이 달리는 주인공을 통해 ‘미국은 왜 달리는가, 어디로 달려가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의 경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마라톤, 조깅, 요가, 자전거 등 아웃도어 레저 스포츠가 성행했는데 스포츠사회학자 김영갑과 정준영은 이러한 신체에 대한 몰입이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외환위기 사태의 후유증이자 곧 그것을 개인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 즉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는 심리적 보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판이 바뀌었다, 취향과 즐거움 찾기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일상이 회복되면 틀림없이 자신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고 이로써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문화가 펼쳐질 것이다. 다만 위에 언급한 사례들과 결이 다른 것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의 끈질긴 싸움, 그것도 거의 모든 사람이 국적에 상관없이 가히 온 인류가 함께 싸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특정한 나라를 제압하고 그 나라 국민을 억누르는 과정(혹은 그러한 핍박을 받는 입장)에 따른 ‘신체 몰입’이 아니라 코로나19와 맞서 싸운 과정이었기에, 가까운 장래에 보게 될 레저스포츠 문화의 풍경은 위에 언급한 사례들의 재판이 될 우려는 매우 낮다.

그래서 나의 상상은 좀 더 현실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제압(혹은 제압당해)하는 과정 이후의 신체 몰입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 펼쳐질 풍경들도 ‘누구보다 더 강한 신체’라기 보다는 저마다의 신체 조건에서 저마다의 취향과 즐거움을 찾아서 제 나름대로 레저스포츠 문화를 ‘억압 없이’ 즐기는 풍경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상상하고 추론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그동안 전 지구적으로나 우리 사회 내적으로나, 스포츠에 대한 가치가 과거의 ‘강한 체력 국위선양’에서 많이 변화하고 다양해졌다는 걸 들고 싶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국가 간 경쟁의 장’으로 지나치게 강화돼 온 올림픽대회를, 스포츠 대회이니만큼 그 기본 뼈대는 유지하되 좀 더 당대적인 세계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장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국제 간 분쟁, 노동과 환경, 교육, 기후와 환경, 혐오와 차별 등의 수많은 당대의 문제가 올림픽을 통해 좀 더 다채롭게 제기되는 한편 다양하게 펼쳐지는 각종 스포츠 대회를 통해 이러한 세계적 긴장을 완화하고 소통하는 장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IOC가 새롭게 추구하고 있는 올림픽 운동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 스포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 8월4일,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기존 국민체육진흥의 목적이 ‘국위 선양’에서 ‘연대’ ‘인권’ ‘행복’ ‘공동체’ 등으로 바뀐 것은 아주 상징적이다. 단순히 문구가 변한 게 아니라 스포츠 정책의 방향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사업 내용이 이로 인해 추진력을 갖게 된 것이다.

스포츠, 도시재생 윤활유로

이 지면에서 거듭 강조했지만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에서도 스포츠가 참여할 폭이 상당히 넓다. 우리의 군소 도시들이 활력 잃고 인구 변동, 주거, 교육, 교통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13년 도시재생 관련 법률이 제정됐고 그 이후 7년 동안 국토교통부가 주도하는 다양한 사업이 전개됐다. 여기에 2018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참여해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이 수년째 전개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스포츠가 결합하게 되면 스포츠와 관련된 도시 인프라의 확장, 스포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주민들의 관계망,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를 전공한 청년세대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수 있다. 다른 여러 문화적 방법에 비해 스포츠가 주민공동체의 접착제이자 도시재생의 윤활유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스포츠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징, 즉 직접 몸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스포츠에 대한 변화된 가치와 인식에 의해 다시 모이게 되면 그것은 ‘남보다 강한 신체의 단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스포츠 문화’가 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내가 상상하는 ‘코로나19 이후’ 2021년 새봄의 풍경이다. 차디찬 겨울 한복판에서, 아주 심각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나는 몇 개월 후 벚꽃 필 무렵의 새로운 스포츠 문화를 상상한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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